자동차 시장이 초고속으로 진화하고 있다. 100년 넘게 도로를 주름잡았던 가솔린 엔진은 머지 않아 배터리와 전기모터에 밀려날 추세다. 기계식 부품은 이미 상당부분 전자식 장비로 대체됐다. 이에 따라 부품과 모듈을 개발·생산하는 현대모비스의 그룹 내 위상도 부쩍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정몽구 현대차 회장은 이처럼 중요한 기업의 운전대를 전호석 사장에게 맡겼다. 정 회장은 전 사장의 어떤 점을 믿고 있는 것일까.
차병선 기자 acha@hk.co.kr
전호석(61) 현대모비스 사장은 겸양의 CEO다. 자기 성과를 과시하는 일반적인 경영인과 달리 조용히 자기 본업에만 충실하게 임한다. 언론을 상대로 자기 성과를 떠벌리지도 않고, 자동차 산업의 미래가 제 손 안에 있다는 양 섣불리 나서지도 않는다. 더구나 2012년 경영실적도 뛰어났다. 매출액이 전년대비 17.1% 증가한 30조7,890억 원을 기록했다. 매출이 30조 원을 돌파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전 사장이 나서지 않는 건, 어쩌면 그의 개인적 성향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전 사장은 전형적인 엔지니어 출신이다. 1952년 서울 태생인 전 사장은 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와 크랜필드대학 자동차공학 석사 등을 거쳐 1979년 현대자동차에 입사했다. 이후 유럽기술연구소장, 차량개발1센터장을 역임하는 등 개발 쪽에 몸담고 있다가 2009년 현대모비스로 이동해 2010년부터 현대모비스 대표이사직을 맡고 있다. 일반적으로 엔지니어 출신은 대외활동에 소극적이다. 수줍은 성격 탓인지 아니면 경영에 필요하지 않다고 느껴서인지는 모른다. 어쨌거나 전 사장은 취임 이후 단 한 번도 언론과 인터뷰를 갖지 않았다. 어쩌면 이 같은 분위기는 현대차 그룹의 문화인지도 모른다.
현대차그룹에는 엔지니어 출신 경영인이 많다. 현대차에는 신종운 부회장, 양웅철 부회장, 김해진 사장이 있고, 기아차에는 이형근 부회장, 현대건설에는 정수현 사장 등이 있다. 경영평가사이트 CEO스코어가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현대차그룹에는 총 26명의 사장급 이상 임원이 있는데, 이중 기술분야 출신이 9명으로 가장 많다. 그 밖에는 경영기획 출신이 5명, 재무출신이 3명 등이다.
이 같은 출신 배경이나 개인적 성향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대차그룹의 CEO들은 좀처럼 나서지도 튀지도 않는다. 그룹 내에서 가장 이름이 많이 오르내리는 경영인으론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부회장을 제외하곤 피터 슈라이어 기아차 사장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스타 CEO가 많은 삼성이나 LG그룹과는 큰 차이가 느껴진다.
전호석 사장과 같은 엔지니어 출신 CEO는 대신 기술 개발과 같은 실질적인 사업에 역량을 총동원한다. 이는 또한 시대의 요구와도 부합된다. 자동차 산업은 과거 어느 때보다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엔진과 기계장치는 모터와 전자장치로 대체됐다. 현대모비스의 기술력은 현대차그룹 내에서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정몽구 회장이 다른 사람이 아닌 전 사장에게 현대모비스를 맡긴 것도 그의 연구개발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정 회장은 2011년 말 그룹 사장단 인사에서 정석수 당시 현대모비스 부회장을 고문으로 위촉하고, 전호석 사장을 총괄사장으로 임명했다. 당시 현대모비스 외에 현대건설 등 주요 계열사에서도 임원 상당수가 고문직으로 한발 물러나고 전 사장과 같은 인물들이 전면에 등장했다. 기존의 가신 그룹 대신 전문성과 미래가치를 선택한 것이다.
전 사장은 현대모비스에 부임한 이래 미래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연구개발을 강화하는 등 현대모비스의 변신을 주도하고 있다. 특히 지능형 안전차량 기술과 친환경 자동차 핵심기술 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지능형 안전기술 분야에선 전 사장의 지휘 아래 첨단 제동장치(MEB), LED 헤드램프, 전자식 조향장치(MDPS) 등을 독자 개발해 생산하고 있다. 또한 기계 시스템에 전자기술을 융합해 차선 유지, 자동 주차, 충돌 회피, 차간 거리 제어기술 등 미래지능형 자동차를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해가고 있다. 올 1월에는 국내 최초로 내비게이션과 연동해 조명을 자동 조절하는 차세대 지능형 헤드램프 시스템 AILS 개발에 성공했다.
하이브리드카, 전기차와 같은 친환경 자동차 분야에선 구동모터와 통합패키지모듈(IPM)과 같은 핵심 부품을 생산하고 있다. 구동모터는 기존 가솔린 차량의 엔진 역할을 분담하는 부품이고, IPM은 전기모터와 배터리 제어, 배터리 전압 변환 등을 제어하는 모듈이다. 구동모터와 IPM은 하이브리드 자동차 전용 부품 가운데 기능 기여도 면에서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 외에도 전 사장은 유해물질 유발을 억제하는 제품을 개발하고, 재활용 가능한 소재를 적용하는 등 친환경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다. 일례로 운전석모듈 부분의 크래시패드 표면처리를 유성에서 수성으로 바꿔 톨루엔이나 아세톤 같은 유해물질을 30%, 포름알데히드를 40% 감소시키기도 했다.
전 사장이 개발하는 기술은 우선 현대차그룹의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있다. 그리고 다시 현대차가 가진 경쟁력은 현대모비스가 지속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되어주고 있다. 선순환 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전 사장의 기술 중심 경영은 현대모비스가 글로벌 부품업체로 위상을 높이는 데에도 기여하고 있다. 현대모비스는 지난 몇 년간 해외 완성차 업체를 상대로 부품 수출을 꾸준히 늘려가고 있다. 북미의 GM과 크라이슬러는 물론, 유럽의 벤츠와 BMW, 일본 미쓰비시와 스바루 등과도 부품 공급 계약을 늘려가고 있다. 현대모비스가 해외 완성차 업체를 상대로 올린 매출도 2009년 5억5,000만 달러에서 2010년 11억7,000만 달러, 2011년 18억2,000만 달러로 빠르게 성장했다. 전 사장은 현재 매출의 10% 정도인 수출 비중을 2020년까지 20%로 올리겠다는 계획을 내놓고 있다. 이를 위해 북미, 유럽, 중국, 인도에 글로벌 연구개발 센터를 운영하며 현지에 적합한 제품 설계도 추진하고 있다. 전 사장은 지난해 12월 무역의 날, 무역진흥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듯이, 전 사장은 실적을 통해 경영능력을 증명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총괄사장 취임 첫해인 2011년에 사상 처음으로 매출 30조 원을 넘어섰고, 당기순이익도 17% 오른 3조5,420억 원을 기록했다. 영업이익은 전년대비 10.2% 증가한 2조9,064억 원이었다. 현대모비스 관계자는 “글로벌 완성차 시장이 판매 호조를 보이고, 해외 신차 효과가 나타나 매출이 성장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사업부문별로 살펴보면, 모듈 및 핵심부품 제조사업 부문은 24조602억 원으로 전년 대비 15.1% 늘었고, 부품판매 매출은 5조8891억 원으로 9.2% 증가했다. 현대모비스 관계자는 말한다. “북경3공장과 브라질 공장의 양산 개시로 해외 생산량이 증가해 모듈과 전장, 핵심부품 매출이 늘었어요. 부품사업 부문에선 마케팅을 강화해 국내외 AS부품시장을 확대했죠. 또 차량 운행 대수 증가에 따라 자연스럽게 부품 판매량도 늘어난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영업이익률은 9.4%로 전년대비 0.6%포인트 하락했다. 이는 지난해 상반기 현대라이프생명보험의 인프라 구축에 비용이 투자되어 금융부문의 영업이익이 감소한 데 따른 결과라고 회사 측은 설명하고 있다.
현대모비스의 실적은 계열사 내 형님 격인 현대차나 기아차를 앞지르고 있다. 지난해 현대차 매출은 84조4,697억 원, 영업이익 8조4,369억 원으로 전년 대비 각각 8.6%, 5.1% 증가했다. 두 자릿수 성장률을 보인 현대모비스에 비견되는 수치다. 기아차 역시 매출 47조2,429억 원, 영업이익 3조5,223억 원으로 전년대비 각각 9.4%, 0.7% 상승하는 데 그쳤다.
증권업계는 올해에도 현대모비스가 견조한 실적성장을 이룰 것이라 보고 있다. 남경문 KTB투자증권 연구원은 말한다. “원화 강세와 엔화 약세 등으로 완성차 업체에 좋지 않은 환경이 만들어졌습니다. 다소간의 실적부진이 예상됩니다. 하지만 현대모비스는 AS사업을 영위하고 있어 안정적인 이익을 창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사업에서도 이익이 꾸준히 늘고 있어 좋은 실적을 올릴 것으로 기대됩니다.”
안세환 IBK투자증권 연구원도 비슷한 목소리를 냈다. “현대모비스가 완성차보다 밸류에이션을 더 높게 할증 받아야 할 이유는 많습니다. 완성차 대비 매출성장세가 높고, 중국 시장이 호조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죠. 고마진 전장부품이 늘어나 이익이 개선되고 있다는 점과 경기변동에 영향을 덜 받는 AS사업부가 수익률을 방어해 주고 있다는 점도 현대모비스를 높게 평가해야 할 요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해외 공장도 줄지어 증설할 계획이다. 올해 8월 강소램프 2공장, 9월 터키 모듈공장, 내년 8월 인도에어백공장과 강소모듈 3공장을 연이어 증설할 예정이다. 일부 국내 부문 실적에 대한 우려가 있긴 하지만 증권가의 기대는 높은 편이다. 고태봉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말한다. “국내 자동차 업계가 3월부터 주간 연속 2교대 근무제*를 시행하기 때문에 국내 공장 생산 규모가 다소 줄 것으로 예상됩니다. 하지만 중국과 브라질 신규 공장 등의 본격적인 가동을 앞두고 있어 큰 영향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