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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 장기 제조 공장

THE BODY SHOP

3D 프린터는 전통적 제조업의 개념을 바꿔놓고 있다. 그리고 이제 제조업을 넘어 의료계에도 혁신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인간이 만든 기계가 인간의 장기(臟器)를 만드는 세상이 도래하는 것이다.

에스프레소 머신만한 기계가 윙윙거리며 작동을 시작했다. 이 기계에는 코끝을 자극하는 신선한 커피가루는 들어있지 않다. 그 대신 살균 처리된 불투명한 점액물질이 들어 있다. 로봇 팔이 6개의 실험용 접시 위를 활발하게 움직이며 두 개의 주사기를 이용해 흰색의 점액질을 뿜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접시 위에는 3개의 작은 육각형이 생겨났다. 그리고 다시 몇 분이 경과하자 육각형들은 손톱 크기의 벌집 구조로 변해갔다. 분명 카페라테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소재 재생의학기업 오가노보(Organovo)의 연구실. 이 회사의 최고기술경영자(CTO)인 샤론 프레스넬에 따르면 이것은 인간의 간, 아니 적어도 간의
기초가 되는 구조물이이다.

현대 생체의공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이 작은 벌집은 인간의 간에서 떼어낸 조직의 표본과 거의 똑같다. 게다가 이는 실제 인간의 세포로 만들어졌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곳의 과학자들은 세포를 성장시키는 대신 서류를 인쇄하듯 프린트한다는 점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축소모형을 제작하는 것 같다는 것이 옳을 듯하다.

20년 전만 해도 3D 프린터는 제조업의 일부 틈새공정을 공략했다. 하지만 지금은 무려 27억 달러 규모의 산업으로 성장했다. 제작 가능한 물건도 장난감에서 손목시계, 항공기 부품, 식량에 이르기까지 다양해졌다. 이런 기술적 발전에 힘입어 오가노보 연구팀을 포함한 전 세계 과학계는 3D 프린팅 기술을 의료분야에 접목, 의료혁신의 속도를 가속화하려 하고 있는 상태다.

그러나 혁신발명전문기업 DEKA 리서치의 창립자이자 의료기기를 중심으로 440건 이상의 특허권 보유자인 딘 카멘은 플라스틱, 금속, 초콜릿 등의 소재를 사용하는 것과 살아있는 세포로 3D 프린팅을 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강조한다.

“당연히 후자가 훨씬 어렵습니다. 여러 모로 많은 기술적 난제를 극복해야하죠. 하지만 우리는 현재 그 임계점에 서 있습니다.”

실제로 세계 각국의 생체공학자들은 이미 3D 프린터를 활용해 인체의 여러 부위를 인쇄하기 시작했다. 심장판막, 귀, 뼈, 관절, 무릎 연골, 혈관, 피부 등의 인공 인체 시제품들이 세상에 나왔다.

“도구가 컴퍼스와 자 뿐이라면 원과 네모, 세모 정도를 그릴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더 좋은 도구가 쥐어진다면 아예 생각부터 다르게 할 수 있죠. 3D 프린터로 인해 우리는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습니다.”

카멘의 설명은 2008년부터 2011년 사이 3D 프린터에 기반한 바이오프린팅을 다룬 학술논문의 수가 3배 가까이 늘어난 것으로 입증된다. 이 분야에 대한 투자액도 급격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미 국립보건원(NIH) 산하 국립 심장·폐·혈액연구원(NHLBI)만 해도 2007년 이래 바이오프린팅 프로젝트에 60만 달러의 자금을 지원했고, 작년 한 해 동안 오가노보의 자산 가치는 2,470만 달러나 증대됐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트렌드가 3가지 요인에 의해 확산되고 있다고 본다. 더 정밀해진 3D 프린터, 재생의학기술의 발전, 더 향상된 캐드(CAD) 소프트웨어가 그것이다. 덕분에 25세의 시스템공학자 비비안 고겐 박사가 오가노보에서 간 조직을 프린트할 때 하는 것이라고는 마우스로 ‘실행’ 버튼을 클릭하는 것뿐이다.

물론 그의 벌집 구조물이 실제 간과 동일한 기능을 발휘하는 인공장기로 발전하는 데는 앞으로도 가야할 길이 멀다. 그렇지만 프레스넬은 미래를 긍정적으로 점친다.

“고겐 박사 같은 사람들의 연구가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네요. 제가 죽기 전까지는 완제품 인공장기를 프린트해서 환자에게 이식하는 시대가 올 것으로 믿습니다.”





초의 바이오프린터는 비싸지도 멋지지도 않았다. 싸구려 프린터처럼 생겼다. 싸구려 데스크톱 프린터를 개조한 것이었으니 그렇게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자칭 ‘바이오프린팅의 할아버지’인 미국 클렘슨대학 생체공학자 토마스 볼랜드 박사는 지난 2000년의 어느 날 자신의 연구실에 있던 낡은 잉크젯 프린터에 눈길이 닿았다. 당시 과학자들은 이미 잉크젯 프린터를 개조, 유전자 발현 연구를 위한 DNA 인쇄에 사용하고 있었다.

“잉크젯 프린터로 유전자 인쇄가 가능하다면 다른 생체 소재도 인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장 작은 인간 세포의 크기가 10마이크로미터(㎛)인데 일반적 잉크젯 프린터에서 분사되는 잉크 방울의 크기와 거의 같다는 점도 확신을 더해줬죠.”

그는 프린터의 카트리지를 빼내 잉크를 제거하고 콜라겐을 채웠다. 또 A4지에 얇은 검은색 실리콘을 붙여서 프린터에 넣었다. 그리고 PC에서 워드프로그램을 구동시켜 자신의 이름 약자인 ‘TB’를 입력한 뒤 인쇄 버튼을 클릭했다.

“옅은 황백색 콜라겐으로 TB라는 글자가 인쇄되어 나오더군요.”

가능성을 확인한 볼랜드 박사는 곧바로 HP의 데스크젯 550C 프린터를 대장균 인쇄가 가능하도록 개조했다. 그 다음에는 햄스터와 실험용 쥐에서 배양한 포유류 세포, 즉 대장균보다 큰 세포를 프린트할 수 있게 재차 개조를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볼랜드 박사팀은 프린팅을 한 이후에도 세포의 90%가 살아있음을 확인했다. 단순히 세포로 만든 미술품이 아니라 실질적 기능을 가진 무엇인가를 프린터로 인쇄할 수 있음이 입증된 것이다. 이렇게 그는 2003년 세포 프린팅에 관한 최초의 특허를 출원했다.

볼랜드 박사팀이 바이오프린팅 문제에 매달려 있는 동안 다른 엔지니어들은 3D 프린터를 가지고 의학적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이들은 세라믹으로 인체이식용 인공 뼈를, 자기(磁器)로 치관(齒冠)을, 폴리머로 의수족을 인쇄했다. 원하는 물건을 2D가 아닌 3D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은 볼랜드 박사팀에게는 없는 이점이었다.

볼랜드 박사를 필두로 한 여타 바이오프린팅 선구자들은 3D 프린터를 통해 큰 깨달음을 얻고 프린터를 손봤다. 잉크젯의 급지시스템을 제거하고, 엘리베이터처럼 생긴 플랫폼을 장착했다. 플랫폼은 Z축을 따라 상하이동이 가능하도록 설계했고, 제어는 스테퍼 모터를 이용했다. 이렇게 바이오프린팅 연구팀들은 세포를 한 겹 인쇄한 뒤 그 위에 계속해서 세포층을 인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평면 위에 세포로 그림을 그리던 것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조각상을 만들 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미국 웨이크포레스트 재생의학연구소(WFIRM)의 제임스 유 박사는 당시를 회상하며 ‘마법 같았다’고 말했다. 현재 그는 화상 환자의 환부에 덧붙일 이식피부를 인쇄할 휴대형 3D 프린터를 개발 중이다.

“모든 상처는 다릅니다. 깊이도 다르고, 모양도 비정형적이에요. 하지만 상처 부위를 매핑하면 피하 조직과 상피 조직의 치료를 위해 몇 겹의 세포층이 필요한지 알 수 있어요. 3D 프린터로 인해 상처부위에 피부 세포들을 한층 정확히 공급할 수 있게 된 겁니다.”

과학자들이 3D 프린터의 ‘잉크’로 이용하는 물질은 다양하다. 미국 코넬대학의 공학자 호드 립슨 박사팀은 무릎을 포함해 여러 관절에서 충격흡수를 담당하는 C자형 연골인 반월판(半月瓣)의 3D 프린팅에 도전장을 던졌다. 이를 위해 그는 CT(단층촬영) 스캐너를 동원해 양의 반월판 모양을 캐드 파일로 만들었고, 양에게서 추출한 세포로 3D 프린팅을 시도했다.

첫 작품은 꽤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외과전문의들은 그의 반월판이 너무 약해서 체내에서 일상적으로 가해지는 힘을 견뎌내기 어렵다는 회의적 평가를 내렸다.

“생물학 분야의 이방인인 제 입장에서 그들의 의견은 ‘나는 세포들을 제 위치에 주입해서 상당기간 동안 세심하게 배양해 반월판을 만들었다고. 프린터로 인쇄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어.’라는 식으로 들리더군요. 하지만 제대로 된 반월판을 만들려면 단순히 세포를 제 위치에 주입해 성장시키는 것으로는 모자랍니다. 반월판은 매 순간 충격을 받아요. 그러면서 모양이 잡히고 단단해지죠. 반월판에 가해지는 충격이야말로 반월판의 성장에 없어서는 안 될 한 축이라는 얘깁니다.”

원하는 종류의 잉크를 분사할 수 있는 3D 프린터의 확보는 어디까지나 첫 단추에 불과하다. 세포들을 어떤 조직으로 성장시킬지에 따라 요구조건도 다르다. 반월판의 경우 조직에 응력을 가해 모양을 잡으려면 충격과 열, 빛, 음파 자극을 제공할 생물반응장치가 필요할 수 있다.



다수 인체 장기는 수십 가지 세포와 혈관들이 복잡하게 얽힌 정밀한 구조를 갖고 있다. 각 장기에 주어진 고유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오랜 기간 진화한 결과물이다. 간 하나만 봐도 기능이 무려 500가지가 넘는다.

문제는 기계와 마찬가지로 인체도 오래 쓰면 마모되거나 고장이 난다는 것. 운이 좋아서 장기이식을 받더라도 이식된 장기가 기대만큼의 성능을 내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기계공학자들이 3D 프린터 개발을 시작했을 무렵, 조직공학자들은 실험실에서 대체장기 배양에 매달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체장기 배양 연구는 피펫을 이용해 실험용 접시에서 세포를 키우는 것부터 시작됐다. 그러던 중 WFIRM의 안소니 아탈라 박사팀에 의해 인공 담체 위에서 세포들을 배양하는 방식이 창안됐다. 생분해성 폴리머나 콜라겐으로 제작된 담체들은 세포가 튼튼해져서 자립이 가능할 때까지 일시적으로 달라붙어 있는 모체가 된다.

이 방식의 효과는 훌륭했다. 아탈라 박사는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실험실에서 배양한 인공 방광을 보스턴아동병원의 어린이 환자 7명에게 이식하는 데 성공했다. 참고로 그의 방광은 실험실에서 배양된 최초의 인공장기였다.

WFIRM의 제임스 유 박사에 의하면 얼마 뒤 연구자들은 더 정밀한 담체의 제작을 위해 3D 프린터를 동원했다. 하지만 담체에 세포를 올려놓는 일은 여전히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아야 하는 수작업에 의존하고 있었다.

“방광은 두 종류의 세포로 만들 수 있지만 신장은 30종의 세포가 필요합니다. 이보다 더 복잡한 장기들도 있죠. 이런 장기를 만들 때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세포를 이곳저곳에 배치하는 것은 비효율적인 데다 정확성도 매우 낮습니다. 손은 세포를 배치하기에 적합한 도구가 아니니까요.”

이에 유 박사팀과 아탈라 박사팀은 잉크젯 프린터를 개조한 것보다 빠르고 줄기세포, 근육세포, 혈관세포 등 다양한 종류의 세포를 인쇄할 바이오프린터를 개발해냈다. 또한 세포들을 키워낼 합성물질 담체와 조직을 인쇄하는 프린터도 설계했다. 현재 두 연구팀은 이 프린터들을 이용해 귀와 코, 뼈를 만들고 있다.

바이오프린팅에 있어 담체는 조직에 물리적 안정성을 제공한다. 세포에 유전자와 성장인자를 전달해줄 수도 있다.

단지 담체가 100%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폴리머와 마찬가지로 담체는 이식 과정에서 인체 내에 외부 물질을 유입시켜 염증을 유발할 수 있으며 세포마다 담체의 소재에 다르게 반응한다. 또한 복잡한 장기들은 틀(담체)도 복잡하기 때문에 세포들이 어떻게 정착할지의 예측이 어렵다.

그로 인해 반드시 담체가 필요하지는 않다고 믿는 연구자들이 생겨났다. 오가노보의 공동설립자이자 미국 미주리대학 생물물리학자인 가보르 포르가츠 박사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는 살아있는 인체 조직으로 장기를 프린팅해서 장기 본연의 모습을 갖추도록 만드는 것을 최대 목표로 삼고 있다.

포르가츠 박사는 과거 미국 미주리주에서 형태형성을 연구했었다. 형태형성이란 쉽게 발해 배아세포가 성장하면서 여러 장기와 인체기관이 생겨나는 과정이다. 이것처럼 포르가츠 박사의 연구실에서도 세포군들이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구조물을 형성하는 과정을 관찰할 수 있다.

포르가츠 박사팀은 미 국립과학재단(NSF)의 보조금 덕분에 손으로 세포들을 배열하던 상황에서 벗어나 바이오프린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됐고, 이는 그들의 연구 방식을 크게 바꿔놓았다. 과거 며칠씩 걸렸던 일을 지금은 바이오프린터가 이틀 만에 해치우고 있다고 한다.

기술적으로 보면 Z축을 따라 세포를 쌓아 조직을 만드는 것은 이미 가능하다. 실제로 오가노보의 연구자들이 심장세포를 가지고 이 일을 해낸 바 있다. 심장 세포들이 하나로 융합하면 실제 심장처럼 박동한다. 반면 생물학적으로는 큰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다. 이 조직을 성장시켜야 한다는 부분에서 그렇다. 장기는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해 줄 혈관이 반드시 필요하며, 혈관이 없는 장기는 결국 시들어 죽게 된다.

이에 오가노보의 연구팀은 히드로겔 등으로 만든 충전재를 관 모양의 조직 세포 사이에 프린팅하는 방식으로 비교적 튼튼한 혈관 구조의 형성에 성공했다. 추후 충전재를 제거하면 혈액 세포가 통과할 빈 공간을 가진 인공혈관이 된다.

미국 아이오와대학의 기계공학자 이브라힘 오즈볼랏 박사팀은 로봇 팔들이 나란히 움직이며 혈관 구조와 세포들을 동시에 프린팅 할 수 있는 바이오프린터를 개발하기도 했다.

“현재는 핏줄과 세포 사이를 잇는 가느다란 혈관인 모세혈관을 만드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도전과제에요. 하지만 2년 이내에 이 문제는 해결될 것으로 봅니다.”

그의 예상대로 연구자들이 복잡한 혈관계의 프린팅에 성공한다면 지금처럼 장기의 일부만을 프린팅 하는 것을 넘어 장기 전체를 프린팅하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리우드 영화배우 브루스 윌리스가 오가노보의 청정실 내 기계 옆에 서서 방문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실제 브루스 윌리스가 아니라 그의 사진이었다. 관계자의 설명을 들어보니 이곳의 바이오프린터 10대 중 몇 대에는 1997년 개봉한 공상과학 영화 ‘제5원소’의 주인공들 이름이 붙어 있었다. 브루스 윌리스가 연기했던 ‘달라스’ 바이오프린터를 지나면 크리스 터커와 게리 올드먼이 연기한 ‘루비’와 ‘조그’ 바이오프린터도 볼 수 있다.

서기 2259년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는 두 개의 로봇 팔을 갖춘 무인 포드가 바이오프린팅 기술을 통해 손이 잘려나간 여성을 완벽히 재생해내는 장면이 나온다. 현실에서 어설프게라도 그런 기술을 흉내 내려면 가야할 길이 멀다. 어쩌면 영원히 그런 날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바이오프린팅의 전 과정을 명확히 시각화하고 모델화할 수 있는 도구를 개발한다면 제5원소에서의 장면을 현실화하기 위해 가야할 길에 확실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현재의 바이오프린터 기술에서 가장 부족한 부분, 그래서 조속히 기술혁신이 필요한 부분은 생물학적으로 정밀한 소프트웨어의 개발이다. 이것만 갖춰지면 새로운 돌파구들이 줄줄이 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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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잔과 같은 무생물들은 불과 몇 분이면 3D 스캐너로 캐드 파일을 만들어 3D 프린터에 업로드할 수 있다. 하지만 의료계에서는 절대로 성립이 안 되는 얘기다. 코넬대학 립슨 박사는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MRI를 촬영해도 세포의 위치까지는 알 수 없어요. 저희는 설계도도 없이 물건을 만들고 있는 거죠. 달리 표현하면 이는 퍼즐을 맞추는 것과도 같다고 봅니다. 사실 인간의 장기를 소프트웨어 모델링한다는 것 자체가 현 기술로는 말도 안 되는 얘기에요. 간만 해도 제트기보다 복잡한 물건이거든요.”

오토캐드라는 소프트웨어로 유명한 오토데스크는 한동안 기회를 엿보다가 얼마 전 바이오프린팅용 캐드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오가노보와 손을 잡았다. 그 첫걸음으로 현대적 개념의 클라우드 기반 캐드 쉘(CAD Shell)을 개발, 설계 과정을 효율화할 계획이다. 궁극적 목표는 자가조립과 세포들의 작동기전을 수학적으로 개념화해 바이오프린팅 소프트웨어에 통합시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오토데스크는 지난 4월 ‘프로젝트 사이보그’라는 소프트웨어를 내놓았다. 이 제품은 나노스케일 분자 모델링과 세포 생물학 시뮬레이션을 위한 웹 기반 플랫폼이다. 오토데스크의 바이오·나노·프로그램 가능 소재 사업단의 카를로스 올귄 단장에 따르면 연구자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세포들을 디지털로 설계한 다음 엔터키만 누르면 순식간에 시각화가 이뤄진다. 이렇게 연구자들은 어디를 고치고, 어디를 개선해야 완성된 조직이 될지 알 수 있게 된다.

“단기적으로는 바이오프린트에 걸리는 시간이 획기적으로 단축될 것입니다. 중기적으로는 가장 기본적 구조를 잡는 것에도 엄청난 수고를 들여야 했던 과거의 방식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만큼 연구자들은 더 흥미로운 적용방식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됩니다.”

오가노보 최초의 생물학 제품은 신약 등 의약품 시험용 간 조직이 될 것이다. 제약업계가 매년 연구개발에 사용하는 예산은 390억 달러가 넘는다. 그리고 미 식품의약국(FDA) 자료를 보면 신약들이 임상실험 중이나 상용제품 출시 후 시장에서 도태되는 가장 큰 이유는 간에 미치는 독성이다.

그럼에도 아직은 사람이 먹어보기 전에는 신약이 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할 신뢰성 높은 방법은 없다. 오가노보의 프레스넬 박사는 이 부분이 동물 실험으로도 해결이 불가능한 맹점 중의 맹점이라 강조한다.

“쥐 같은 실험동물과 인간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쥐실험에서 안전이 확인됐더라도 인간에게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어요.”

미국 스탠포드대학 연구팀에서는 이러한 부분을 해결코자 거의 모든 간세포가 인간의 간세포로 이뤄진 간을 지닌 실험용 쥐를 만들어냈다. 작년 10월 발표된 연구결과에 의하면 이 쥐에 C형 간염 치료제를 투여했더니 인간과 거의 동일한 대사반응이 나타났다고 한다. MIT 연구팀의 경우 마이크로 패터닝 기술을 적용해 간의 축소모형을 개발하기도 했다.

내년 중 오가노보는 3D 바이오프린터로 만든 인간의 간 시료를 공식 판매할 계획이다. 이 시료는 웰 플레이트에 200~500㎛ 두께로 간세포를 인쇄한 것이다. 아직 인공장기라고는 할 수 없지만 시료 개념의 간도 시장성이 밝다는 게 오가보노의 판단이다. 경구 투여되는 약이라면 진통제, 소염제, 항암제를 막론하고 간에 대한 독성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영국 글래스고 대학의 화학자인 리 크로닌 박사는 타깃을 인체기관이 아닌 의약품으로 삼았다. 화학물질을 잉크로 사용해 의약품을 인쇄하는 3D 프린터를 개발하고 있는 것.

“의약품 연구자들은 보통 화학물질을 정제해서 약으로 만들면 가장 먼저 인간 세포에 투여해 반응을 지켜봅니다. 이때 이상이 없으면 동물실험을 진행하고, 여기서도 괜찮으면 임상시험에 들어가죠. 그런데 화학물질을 담는 시험관을 플라스틱 대신 인체조직으로 프린팅하면 어떨까요. 화학물질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실시간 확인되지 않을까요?

어쨌든 제약업계가 바이오프린팅 시료에 힘입어 양질의 데이터를 더 빠른 시간 내에 얻어낸다면 신약 개발의 속도는 빨라지고, 비용은 절감될 것이다. 지금처럼 동물실험에 크게 의존할 필요도 없어진다.

미국 아이오와대학 오즈볼랏 박사도 바이오프린팅 인공장기를 연구하고 있다. 치료 목적의 인공 췌장 조직을 프린팅 하는 것이 최종 목표다. 췌장 조직은 인슐린을 생산할 수 있는 내분비세포로만 만들 수 있는데 이 췌장을 이식하면 혈당치를 조절, 제1형 당뇨병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바이오 3D 프린터는 의과대학에서도 매우 가치 있게 쓰일 수 있다. 현재 학생들은 시신을 활용해 실습을 하지만 암세포 제거 같은 수술을 연습하려면 실제 암세포를 제거해보는 것이 가장 좋다. 즉 바이오프린터는 건강한 조직은 물론 암을 비롯한 다른 질병에 걸린 조직도 프린팅이 가능하기 때문에 의사들의 수술능력 향상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재차 언급하지만 지금껏 소개된 모든 연구팀의 궁극적 목표는 특정 장기의 전체를 프린팅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분야의 연구자들은 바이오프린터가 어쩌면 인간의 장기가 원래 지녔던 기능을 뛰어넘는 인공 생체공학 장기를 만들어낼 개연성도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 프린스턴대학 연구팀이 바이오프린팅과 전자제품을 접목시키는 실험을 하고 있는 것도 이를 염두에 둔 연구프로젝트다.

올해 초 이들은 히드로겔과 소의 세포를 귀 모양으로 인쇄하여 코일안테나 모양으로 배열된 은나노 입자를 결합시켰다. 이 시스템은 인간이 들을 수 없는 무선 주파수도 탐지할 수 잇다. 같은 맥락에서 다른 인공 조직이나 장기에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센서를 결합한다면 ‘육백만불의 사나이’나 ‘소머즈’ 같은 초인적 능력의 소유자가 탄생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 다양한 인체 부위가 3D 프린터에 의해 제작되고 이다. 미래의 수술실에 놓여 있게 될 3D 프린팅 인공장기들을 예상해봤다.



인체부위:
연구팀: 미국 코넬대학


제작방법
어린이의 귀를 3D 스캔한 데이터에 기반해 솔리드웍스의 캐드 프로그램으로 귀 모양의 틀 7개를 설계하여 3D 프린팅한다. 이 틀 속에 연골세포 2억5,000만개와 쥐꼬리에서 추출한 콜라겐 담체(carrier)로 만든 고밀도 겔을 3D 인쇄한다. 인쇄가 완료되면 15분 후 틀에서 귀를 분리한다. 분리한 귀는 며칠간 세포 배양액에 담가 배양시킨다. 그러면 3개월 내 연골세포가 증식, 콜라겐 담체를 대체해버린다.

기대효과
신생아 1만2,500명 중 1명 이상이 소이증을 안고 태어난다. 이런 아이들은 청력 손상 및 그에 따른 언어발달 장애를 겪을 수 있다. 인체세포로 만든 인공 외이(外耳)는 합성소재 제품보다 훨씬 성공적으로 귀와 일체화될 수 있다.



인체부위: 신장
연구팀: 웨이크포레스트 재생의학연구소


제작방법
생체조직검사를 통해 신장세포를 얻어서 배양한다. 3D 프린터를 이용하면 이렇게 확보한 다양한 신장 세포들을 프린팅 할 수 있으며 세포와 생분해성 소재의 담체를 동시에 프린팅 하는 것도 가능하다. 프린팅이 완료되면 배양과정을 거쳐 환자에게 이식된다. 담체는 세포조직이 성장하면서 천천히 분해된다.

기대효과
미국의 장기이식 대기자 중 80%가 신장 이식이 필요한 환자다. 우리나라도 2012년 7월 기준 1만1,700명이 신장이식을 대기 중이다. 아직까지 완벽한 기능을 발휘하는 바이오프린팅 인공 신장은 개발되지 못했지만 그렇게만 된다면 환자 본인의 세포로 신장 조직을 만들 수 있다. 거부반응이 전혀 없는 신장을 모든 대기자들에게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체부위: 혈관
연구팀: 미국 MIT 및 펜실베이니아대학


제작방법
오픈소스 3D 프린터와 전용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담체 안에 설탕 소재의 가느다란 필라멘트 망을 인쇄한다. 그리고 옥수수에서 추출한 폴리머로 이 필라멘트를 코팅한다. 그런 다음 조직세포가 함유된 겔을 담체 안에 프린트한다. 각 부분의 정착이 이뤄진 뒤 물로 씻어내면 설탕이 녹으면서 혈액세포가 지나다닐 수 있는 빈 통로가 생긴다.

기대효과
연구팀은 이 통로로 영양분을 공급하면 주변 세포의 생존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조직의 건강 유지는 혈관에게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장기 전체를 3D 프린팅하기 위해서는 향후 더 큰 혈관을 인쇄해서 한층 거대한 혈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인체부위: 피부
연구팀: 웨이크포레스트 재생의학연구소


제작방법
바이오프린터로 환부를 스캔 및 매핑한다. 그리고 2개의 잉크젯 밸브 중 하나에서 트롬빈 효소를, 다른 하나에서 콜라겐과 피브리노겐을 혼합한 세포를 분출한다. 여기에다 인간의 섬유아세포와 피부세포(각질형성세포, keratinocyte)를 각각 한 층씩 인쇄하면 된다.

기대효과
전통적 피부이식술은 환자의 다른 신체부위에서 피부를 떼어와 환부에 이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웨이크포레스트 연구팀은 새로운 피부를 3D 프린팅해 환부에 붙이는 방식을 표방한다. 그만큼 환자들은 조금이나마 고통을 줄일 수 있다. 궁극적 목표는 전쟁터, 재해지역 등에서 환자발생 시 즉각 치료가 가능한 휴대형 피부 프린터의 개발이다.



인체부위:
연구팀: 미국 워싱턴주립대학


제작방법
인간의 뼈는 70%가 세라믹이다. 그래서 연구팀은 전기모터용 금속부품 제작에 쓰였던 3D프린터를 이용해 세라믹 분말로 담체를 프린팅했다. 이후 잉크젯 프린터로 수지 점결제를 한 층 인쇄하고, 1,250℃에서 2시간 동안 굽는다. 마지막으로 이를 뼈세포가 들어있는 배양액에 담그면 하루 뒤 담체가 뼈세포를 지지해준다.

기대효과
매년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 이상이 교통사고 등에 의해 복합골절상을 입는다. 복합골절은 기존 치료법으로는 완벽한 치료가 어렵다. 이때 의사들은 MRI 스캔 이미지를 참고해 사고 전의 환자 뼈와 똑같은 뼈를 프린팅에 이식해줄 수 있다.



[how it works]
노보젠 MMX 바이오프린터

오가노보가 개발한 세계 최초의 상용 3D 바이오프린터 ‘노보젠 MMX’는 생화학자들의 신약개발 실험에 도움을 줄 간 조직을 생산할 수 있다. 그 작동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다.

STEP1: 엔지니어가 바이오잉크[A]를 주사기 하나에 채운다. 이 바이오잉크는 수만 개의 간세포가 들어 있는 회전타원체들로 이뤄져 있다. 다른 하나의 주사기에도 바이오잉크[B]를 채우는 데 여기에 주입되는 바이오잉크는 세포성장을 촉진하는 비(非)간세포와 방출을 돕는 히드로겔을 함유한다.

STEP2: 바이오프린터와 연결된 PC의 소프트웨어가 스테퍼 모터에 지시를 내린면 모터와 연결된 로봇 팔이 두 번째 주사기가 달린 펌프 헤드[C]를 상하로 이동시키며 간 조직을 인쇄할 틀을 3D 프린팅한다. 이 틀은 육각형 3개가 벌집 형태로 나열된 모습을 하고 있다.

STEP3: 성냥갑 크기의 삼각측량 센서[D]가 X축, Y축, Z축을 따라 움직이는 두 주사기의 바늘 끝 위치를 측정한다. 소프트웨어는 이 위치 데이터를 가지고 첫 번째 주사기의 위치를 결정한다.

STEP4: 로봇 팔이 첫 번째 주사기의 펌프 헤드[E] 위치를 낮추면 주사기 속 간 세포가 사출되며 벌집 모양의 틀을 채운다.

STEP5: 엔지니어가 웰 플레이트(well plate)[F]를 제거한다. 여기에는 최대 24개의 미세조직 완성품이 들어있는데 조직의 두께는 약 250마이크로미터(㎛)다. 제거한 웰 플레이트를 배양기에 넣으면 세포들이 간 조직의 모습을 갖춰간다.

[tissue]
통나무 쌓기

오가노보의 연구팀은 바이오프린터를 이용해 히드로겔 막대층[청색]과 수천 개의 인체 세포가 들어있는 구(球) 또는 원통들로 이뤄진 바이오잉크[노란색]를 층층이 쌓아올려 혈관과 같은 관상 구조물을 제작한다. 바이오잉크가 녹으면서 관상 구조물을 형성한 뒤 히드로겔을 제거하면 혈관 모양만 남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인공 혈관을 간, 폐, 심장 등의 조직과 결합시킬 수 있다면 지금보다 복잡한 인공장기도 개발할 수 있다.



3D 프린터 얇은 막을 층층이 쌓아올려 입체적 형상의 물건을 제작하는 기계. 주로 플라스틱 소재를 원료로 사용하는데 잉크젯 프린터와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원료를 분사해 이런 명칭이 붙었다.
소이증 (microtia) 귓바퀴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 귓불을 제외한 귀의 다른 부분은 거의 없는 선천성 기형.
트롬빈 (thrombin) 혈액 응고에 관여하는 단백질 분해효소. 혈액응고에 관여하는 당단백질인 피브리노겐(fibrinogen)과 반응해 혈액응고를 일으키는 피브린(fibrin)을 생성한다.
수지 점결제 (plastic binder) 합성수지에 점성을 부여해 잘 엉겨 붙도록 해주는 물질.

파퓰러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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