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토종 스포츠웨어 브랜드 리닝의 김진군 부회장이 중국 소매시장에서 대변혁을 시도하고 있다. 델코리아에서 이미 성공신화를 이룬 바 있는 그에게 현재 중국 의류 제조·유통 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차병선 기자 acha@hk.co.kr
"중국 소매시장이 대수술을 앞두고 있습니다. 한국 기업도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김진군(46) 리닝 부회장이 한국 기업가들에게 전하는 조언이다. 포춘코리아는 지난 6월 17일 한국을 방문한 김 부회장과 인터뷰를 가졌다.
리닝은 중국을 대표하는 토종 스포츠웨어 브랜드로 체조 금메달리스트 출신인 리닝 회장이 1990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리닝 회장은 한때 인민 영웅이었다. 그는 중국이 올림픽에 처음 출전한 1984년 LA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를 따내며 스타덤에 올랐다. 은퇴 뒤 세운 리닝 사 역시 국민적 호응 속에 부동의 시장 1위를 지켜왔다. 하지만 2008년 이후부터 나이키와 아디다스 같은 글로벌 브랜드에 밀려 뒤처지기 시작해 시장 점유율 10%에 못 미칠 정도로 주저 앉았다. 여전히 로컬브랜드 가운데 점유율이 가장 높지만, 글로벌 브랜드와는 시쳇말로 잽이 안될 정도로 사세가 쪼그라들었다. 회사가 망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중국 시장을 지켜보던 미국 TPG캐피털이 리닝 지분을 인수하며 기업 체질 개선에 나섰다. 스포츠의류업계가 단기적인 포화상태지만, 기업 혁신을 통해 가치를 올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TPG는 지난해 1월 전환사채를 인수해 리닝 회장에 이은 2대 주주로 올랐고, 같은 해 7월 김진군 TPG 파트너를 부회장으로 투입시켜 실질적인 개혁을 이끌고 있다.
김 부회장은 기업혁신의 귀재다. 이미 델코리아와 주요 중국 소매기업에서 놀라운 성과를 이뤄낸 바 있다. 김 부회장에겐 자신이 세운 기업 변신 공식이 있다. 첫 번째 공식은 ‘시장에 맞는 비즈니스 모델을 찾으라’는 것이다.
2002년 PC업체 델코리아 대표에 취임한 김 부회장은 4년 만에 8배 가까운 매출 성장을 이끌어냈다. PC업계가 정체된 가운데 이룬 성과여서 더욱 눈부셨다. 김 부회장은 총판에 의존하던 당시 업계 관행을 과감하게 깨고 직영체제로 고객에게 직접 다가갔다. 중간 마진을 없애고, 300만 원대에 달하던 노트북 PC 가격을 100만 원대로 낮췄다.
김 부회장은 말한다. “중소기업과 소호 등은 가격대비 성능에 가장 민감한 시장이었어요. 우리는 이에 맞게 비즈니스 모델을 변화시켜 시장의 호응을 얻었죠.”
이후 TPG로 자리를 옮긴 김 부회장은 중국 시장에서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2007년부터 2010년까지는 자동차 판매업체 ‘차이나 그랜드 오토모티브 서비스 China Grand Automotive Service’에서 대표이사로 근무하며 변신을 이끌었다. 김 부회장은 전국의 자동차 판매사를 인수 합병해 덩치를 키우고 영업이익률을 높였다. 이른바 ‘롤업 Roll Up방식이었다. 롤업은 미국과 유럽의 자동차 판매 시장에서 유용성이 증명됐지만, 그때까지 중국 시장에는 도입되지 않은 상태였다. 김 부회장은 롤업을 통해 1조 원대 매출을 7조 원 규모로 키웠다.
시장이 항상 호황이었던 건 아니었다. 시장이 안 좋을 땐 경쟁사를 싸게 M&A했다. 시장이 회복되면 영업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매년 100% 이상 성장할 수 있었던 건 그런 전략이 주효했기 때문이었다. 김 부회장은 말한다. “시장이 성장하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상황에 맞는 비즈니스 모델만 찾으면 정체된 시장에서도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을 수 있습니다. 게임의 법칙을 바꾸는 거죠.”
김 부회장이 내세우는 두 번째 변신 공식은 ‘플랫폼 즉 관리팀을 선진화’하라는 것이다. 김 부회장은 2009년 다프네 Daphne 지분을 인수해 3년간 경영에 관여했다. 다프네는 중국 판매 1위를 자랑하는 여성용 구두 회사지만 지난 몇 년간 성장이 지체되어 있었다. 김 부회장은 다프네 역시 비즈니스 모델을 바꾸면 성장여지가 크다고 판단했다.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은 패스트 리테일이었다.
패스트 리테일의 생명은 속도에 있다. 시장 반응에 발맞춰 제품 공급량을 조절할 수 있어야 성공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광활한 대지에 13억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에선 엄청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신발은 의류와 달리 자잘한 부속품이 많아 패스트 리테일에 적합치 않다고 업계는 보고 있었다. 하지만 김 부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최신 경영기법을 익힌 전문가들이 함께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내다봤다.
김 부회장은 전문인력을 스카우트했다. 델코리아에서 함께 공급망을 개혁했던 인력을 비롯해 빅데이터 업계의 전문가도 모셔왔다. 이들이 팀을 이뤄 과거 공급망을 해체하고 재배치하기까지 2년이 넘는 시간이 소요됐다.
우선 초기 출시 물량을 70%로 줄였다. 원단도 300개에서 100개로 대폭 줄여 생산라인을 단순화했다. 이를 통해 주문에서 공급까지 90일이 걸리던 시일을 30일로 대폭 단축시켰다. 그리고 출시 이후 1~2주간 판매량을 집계해 과거 판매 데이터와 비교한 뒤 추가 공급량을 결정했다. 이를 통해 재고를 대폭 줄일 수 있었다.
과거에는 불가능한 사업모델이었다. 보통 시즌 제품이 판매되는 기간은 3~4개월이다. 주문에서 공급까지 3개월이 걸릴 때에는 시즌 초에 모든 물량을 제작해 놓을 수 밖에 없다. 재고가 남아도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이를 1개월로 줄임으로써 효율을 높일 수 있었다.
다프네는 지난해 4월 샌들 시즌에 패스트 비즈니스를 본격적으로 가동했다. 매출은 전년도 같은 기간에 비해 50% 가까이 성장했다. 지난해 연간 매출 역시 30% 조금 못 미치게 성장했다. 모두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과 이를 뒷받침할 플랫폼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그렇다면 리닝 역시 이런 변신 공식이 적용될 수 있을까?
리닝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제품의 질, 브랜드 파워, 재고 모두 벼랑 끝까지 몰려 있었다. 선진국 제품을 카피하는 수준의 제품은 시장에서 외면당했다. 생활수준이 높아진 소비자들은 더 나은 제품을 원했다. 때문에 리닝의 브랜드 가치는 하락했다. 브랜드를 생명처럼 관리하는 글로벌 기업에 비해 중국의 창업 1세대는 브랜드 관리능력이 부족했다. 재고가 만리장성처럼 쌓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소비자에게 팔리는 물건보다 도매창고에 쌓이는 물량이 더 많았을 정도였다. 중국 경제성장률이 낮아지면서 소매 시장은 활기를 잃었고, 임금이 상승하며 기업이 지출해야 하는 돈은 더 많아졌다. 성장시대에는 이 같은 단점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본시장에서 새로운 투자처를 찾지 못해 안달일 정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장이 지연되면, 적체된 문제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되게 마련이다.
“리닝이 겪고 있는 문제는 대부분 중국 리테일 기업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지 않죠. 단지 ‘시장이 안 좋다’고 말할 뿐이에요. 비즈니스 모델을 바꾸지 않고선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김 부회장의 말이다.
김 부회장이 리닝에 온 후 가장 먼저 착수한 건 과거 정리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재고였다. 도매상에 남아있는 재고물량이 3조 원을 넘고 있었다. 리닝의 시가총액 7조8,000억 원의 절반에 가까웠다. 회계상으론 매출로 잡혀 있었지만, 원래부터 그건 앓던 이였다. 김 부회장은 재고량을 솔직하게 공표하고 적극적인 처리에 나섰다. 그는 지금 도매상으로부터 되사거나, 할인판매하는 식으로 부담을 털어내고 있다. “썩은 상처를 도려내야 합니다. 하지만 덩치가 큰 기업은 대수술을 감행하기 어려워요. 특히 상장회사는 더하죠. 시장이 이해하지 못하면 주가가 하락하고 큰 손실을 볼 수 밖에 없어요.”
전 세계가 리닝의 변신에 주목했다. 중국 현지언론은 물론 월스트리트저널 아시아판 등도 김 부회장과 인터뷰를 갖고 새로운 시도를 심도 있게 보도했다. 김 부회장은 “마치 중국 소매시장의 미래가 리닝에게 달렸다는 듯 우리를 주목하기 시작했죠”라고 말했다. 재고 처리 방안을 공표한 뒤 주가가 오히려 올랐다. 그는 말한다. “시장이 믿어준 겁니다. 리닝과 새 경영진의 저력을 신뢰한 거죠. 사실 이 같은 기업 수술은 서구에선 가끔 볼 수 있어요. 브랜드 가치가 재고문제보다 더 크다면, 재고를 처리하고 비즈니스를 정상화하는 게 주가에 더 많은 도움
이 됩니다.”
그는 매장 수도 20% 줄였다. 중국에선 매장 수가 성장의 주요 지표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김 부회장은 이 같은 기준이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다며 매장 효율성을 그 대안으로 제시했다. 비즈니스 모델은 패스트 리테일 방식을 점진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현재 물량 중 30% 정도를 패스트 방식으로 생산 판매하고 있다. 도매에서 소매로, 다시 패스트 방식으로 바꿀 때 기업이 겪는 변화가 클 수밖에 없다. 부서 구성이 달라지고 관리 방법이 변해야 한다. 본사 직원 6,000여 명은 물론, 3만 명의 파트너까지 새로운 방식에 적응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김 부회장은 각계 전문가를 영입해 드림팀을 꾸렸다. 화교 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중국 상황에 밝으면서도 글로벌 감각을 갖춘 인재였다.
김 부회장은 브랜드 전략도 가다듬었다. 우후죽순처럼 늘었던 캐주얼 의류는 모두 없애고, 스포츠웨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브랜드 선호도롤 높이기 위해 스폰서십도 확대했다. 현재 중국 최고 인기 스포츠 중 하나가 농구라는 점을 감안해 NBA 스타드웨인 웨이드를 대표 모델로 섭외했다. 김 부회장은 중국 프로농구에서 대학농구, 고교농구, 중학교 농구까지 각종 대회를 지원했다.
그는 품질에도 승부를 걸고 있다. 현재는 최대 약점이지만, 결국 미래에는 품질로 결판이 날 것이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기능성에선 서구 제품을 따라잡기 힘들지만, 디자인에선 승부를 걸어볼 만하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그는 중국인의 감성에 맞는 제품을 만드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 이를 위해 한국 기업을 롤모델로 벤치마킹을 하고 있다. “한국 패션기업은 한때 글로벌 브랜드에 밀렸지만 90년대 말부터는 상황을 역전시켰어요. 서구 트렌드를 따르면서도 고유의 독특한 패션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어필하는데 성공했죠. 빈폴이 폴로를 넘어선 게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죠.” 김 부회장은 리닝 역시 이 같은 현지화에서 답을 찾고 있다.
김 부회장이 한국에 관심을 갖는 또 하나의 이유는 패션감각에 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한국의 패션감각이 중국인 정서와 잘 맞는 것으로 보고 있다. 때문에 한국 패스트 패션과 스포츠마케팅 분야에서 우수한 인력을 끌어들이고 있다. 한국인의 적응력이 뛰어난 만큼, 중국에서도 좋은 성과를 올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다른 패션 기업도 중국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김 부회장은 대답을 주저했다. “많은 한국 기업이 중국에서 고전하고 있어요. 패션의 경우, 디자인 면에선 중국인의 감성에 가깝지만, 경영 전략은 부적절하죠. 대부분 백화점 위주로 입점을 하는데, 거긴 이미 포화된 시장이에요. 글로벌 브랜드와 경쟁하기도 벅차죠. 이랜드가 성공한 건 일찌감치 시장을 선점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기업은 이미 늦었어요. 한국과는 시장규모가 다른데, 동일한 전략으로 나서면 백전백패 할 수밖에 없어요.”
김 부회장은 한국 기업을 위한 성공 법칙을 제시했다. “하지만 한국 기업은 저력이 있어요. 현지화 능력이 뛰어나죠. 국제적인 경영 감각을 갖춘 인재를 영입하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만 찾는다면 어는 누구보다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습니다.” 김 부회장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 “중국 소매 시장은 지금 폭풍전야예요. 이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상황에 맞는 비즈니스 모델만 찾으면 정체된 시장에서도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을 수 있습니다.”
“리닝이 겪고 있는 문제는 대부분 중국 리테일 기업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지 않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