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유럽의 새로운 ‘철의 여인’

EUROPE'S NEW IRON LADY

유럽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리더로 떠오른 앙겔라 메르켈 Angela Merkel 독일총리가 자신이 추진했던 강경한 금융 개혁 조치의 효과를 증명하기 위해 연임에 도전하고 있다.
by VIVIENNE WALT


어느 따뜻한 오후 필자는 메르세데스 벤츠 Mercedes-Benz 신형 전기 스포츠카 SLS AMG를 타고 베를린 시내를 달리고 있었다. 안전 벨트를 하고 낮은 좌석에 앉아 버터처럼 부드러운 핸드 스티치 가죽 시트를 꽉 붙잡고 있었다. 운전을 하던 벤츠의 엔지니어 마틴 칠겐 Martin Zillgen은 “속도가 좀 빠른가요?”라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우리 차량이 굉음을 내며 칼 마르크스 애비뉴 Karl Marx Avenue를 달릴 땐 속이 쓰릴 정도였다. 길가의 나무들은 눈 깜빡 할 사이에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 와중에서도 칠겐은 첨단 기술의 집약체인 이 자동차에 대해 설명했다. 소매가 50만 달러에 달하는 이 스포츠카는 시속 100km까지 도달하는 데 3.9초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몇 초 후면 시속 160km까지 도달한다. 굽이진 길을 돌아 상업 중심가인 알렉잔더플라츠 Alexanderplatz로 진입할 때 칠겐은 “벌써 선주문을 7대나 받았다. 이 차량의 모든 부품은 독일에서 생산되고, 그중 상당 부분은 손으로 직접 만든다”고 자랑했다.

역사적으로 독일이 점하고 있는 독특한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선, 독일 최신 엔지니어링 기술의 집약체인 SLS AMG를 타고 공산주의 창시자의 이름을 딴 칼 마르크스 애비뉴를 드라이브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거의 없다. 이곳은 1953년 소련 탱크가 12명의 비무장 시위자들을 사살한 곳이다. 60년이 지난 지금, 나치 독재정권과 냉전시대의 모습은 우리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 베를린은 고동치는 독일의 심장이자 유럽 경제 위기 해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 자리한 곳이다. 그 사람은 바로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이다.

2005년 메르켈이 처음으로 라인 강에 위치한 포스트모던 양식의 총리관저 7층 집무실에 들어 갈 때만 해도, 그녀는 자신이 이런 역할을 하리라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실업률은 12%를 상회했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다음 해(1990년)에 성사된 통일 비용을 충당하느라 여전히 버거운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크고 탄탄한 경제를 자랑한다. 실업률도 19년 만에 가장 낮은 5.4%를 기록하고 있다. 국가 안정화라는 메르켈의 초기 임무는 훨씬 더 방대한 역할로 대체됐다. 바로 부채로 얼룩진 유럽 국가들을 어떻게 구제할지, 아니면 그들이 구제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커다란 경제 규모와 견고한 지불능력을 갖고 있는 독일은 유럽 28개국 중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아일랜드, 키프로스 같은 국가들을 구제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다. 심각한 국가 부채와 재정적자 때문에 위에 언급한 국가들은 수십만 명의 국민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소중한 사회보장 혜택도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그리스가 거의 파산 직전에 몰렸던 2010년 위기 이후 메르켈은 지속적으로 막대한 구제금융 비용과 유로화 붕괴라는 위험부담을 비교·검토해 왔다. 그녀는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하고 결국 수십억 유로를 쏟아붓는 구제정책을 고안했다. 또 경제력이 취약한 EU 국가들의 부도를 막고, 유로화를 지속시키기 위해 독일이 가장 많은 분담금을 지불하도록 했다.

그 과정에서 메르켈(59)은 독일 국민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리더로 등극할 수 있었다(그녀는 9월 22일 있을 총선에서 3선에 성공할 것으로 예상된다). 헨리 키신저 Henry Kissinger가 유럽에 연락해야 할 때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제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작년 프랑수아 올랑드 Francois Hollande 프랑스 대통령은 취임 선서 직후 엘리제 궁에 짐을 풀기도 전에 메르켈 총리를 만나기 위해 베를린으로 날아갔다. 지난 5월 리커창 중국 총리의 첫 유럽 공식 방문 때도 그가 만난 유일한 유럽 지도자는 바로 메르켈이었다. 7월 말 북아일랜드에서 열렸던 G8 정상회담 후 오바마 대통령은 베를린으로 곧장 날아가 메르켈과 회동했다. 독일 잡지 슈피겔 Der Spiegel이 메르켈에게 지금까지 무력함을 느낀 적이 있는지 물었을 때 그녀는 “보통 땐 그렇지 않다. 나는 인내심을 갖고 다른 이들이 뜻을 함께하도록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거릿 대처 Margaret Thatcher의 현대판을 연상시키는 메르켈은 개혁 추진에 강철 같은 의지를 보여왔다. 그녀는 ‘독일의 자금’이라는 결정적인 요소를 손에 쥔 채, 각국 정부로부터 어려운 양보를 이끌어냈다. 또 유럽 리더들은 노동 규정들을 철저히 재점검하고, 예산 균형을 맞춰 공공재정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메시지는 자국에선 큰 찬사를 받았지만(메르켈의 지지율은 60%가 넘는다), 다른 국가에선 그렇지 못했다. 아테네 거리의 일부 시위자들은 메르켈을 힘 없는 그리스에게 자신의 뜻을 강요하는 ‘나치’로 묘사했다.

메르켈은 이런 비난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대신 6,500억 달러 규모의 ‘유로 안정화 기구(European Stability Mechanism·이하 ESM)’펀드 설립을 추진했다. 독일은 작년 9월에 발족된 ESM의 최대 공여국이었다. 또 메르켈은 일부 독일 금융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럽 은행연합 설립을 지지해 왔다. (이론상 이 연합은) 내년 초부터 프랑크프루트에 위치한 유럽 중앙 은행(Europena Central Bank·ECB)의 손을 빌려 유럽 금융 기관들을 감시할 예정이다. 3월 메르켈은 키프로스를 위한 ‘베일 인(bail-in)’ 거래 *역주: 지급불능 상태에 빠진 은행의 채권자들이 보유채권을 주식으로 전환하거나 채권 일부를 상각해 파산을 막는 것를 성사시켰다. 키프로스 경제 붕괴를 막아주는 조건으로 예금자들이 큰 손실을 감수하도록 한 것이다.

메르켈은 어떤 EU 회원국도 유로화를 포기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심지어 키프로스 같은 작은 국가들도 마찬가지다-각 회원국이 지출을 줄이고 재정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메르켈은 EU 지도자들에게 근검절약의 전형인 독일처럼 행동하기를 권고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그녀처럼 행동하라는 것이다. 독일은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국가들에 비해 신용카드 수수료가 훨씬 낮다(신용 카드를 갖고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국민 대부분은 주택 보유자가 아니라 세입자다. 2008년 서브프라임 위기 후 메르켈은 “금융업계는 스와비아 Swabia의 주부에게 배워야 한다. 그녀가 분에 넘치는 생활은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는 교훈을 알려 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스와비아는 독일 남서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메르켈의 개혁과 긴축정책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정말로 유럽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구제금융은 구조적 문제에 대한 임시방편에 불과한 것일까? 그 문제에 대한 답은 정치적 성향에 따라 갈린다. 보수주의자들은 지속적인 지출 감소를 주장하고 있고, 진보주의자들은 지출 삭감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기만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분명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메르켈의 긴축정책은 도움이 되기보단 피해를 야기할 수 있다며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독일의 자금지원을 받는 국가들도 지나친 예산 삭감 목표에 대해 불만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새롭게 선출된 이탈리아 총리 엔리코 레타 Enrico Letta는 4월 30일 베를린으로 날아가 메르켈을 만났다. 그는 기자들에게 “재원을 어떻게 어디서 마련할지는 국내 문제다. 누구한테 어떠한 설명도 할 필요가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유럽 위기 탈출법에 대한 논쟁이 일고 있는 동안에도 메르켈은 계속 자신의 입장만을 고수하고 있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메르켈에겐 유럽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이 없다고 비난한다. 브뤼셀 ING그룹의 수석 경제학자 카스텐 브르제스키 Carsten Brzeski는 “메르켈을 보고 있으면 마치 안개 속에서 강둑에 부딪히지 않게 조심스레 보트를 조종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EU가 계속 위기 속에서 방황하면 그녀의 의지 또한 지속적으로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지금까지는 흔들림 없는 메르켈의 정책이 효력을 발휘해 왔다. 메르켈이 선거운동을 준비하는 지금, 그녀가 속한 기독교 민주당(Christian Democratic Party)의 승리는 유력해 보인다. 경쟁 정당들은 크게 뒤처져 있다. 하지만 독일이 경기 침체에 빠진다면 유권자들은 차갑게 등을 돌릴 수도 있다. 유로에 비판적인 정당 ‘독일의 새로운 대안(Alternative for Germany)’을 설립한 경제학자 베른트 루케 Bernd Lucke는 올 초 “(국민들 사이에) 정부의 유로 구제 정책에 대한 깊은 불만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 당은 부채로 허덕이는 EU국가들은 유로존이나 EU 자체에서 탈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루케는 “상환능력이 없는 국가들을 위해 수억 유로가 낭비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독일은 실업률이 낮지만 앞으로 위기 가능성도 존재한다. 가장 큰 걱정거리는 인구 감소와 고령화다(독일의 출산율은 유럽에서 가장 낮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시한폭탄에 비유한다. 독일 여성들이 더 많은 아이를 낳도록 설득하는 것은 메르켈의 시급한 과제다. 메르켈 자신도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화학자 요아임 자우어 Joachim Sauer와) 결혼 했지만 아이가 없다. 그럼에도 많은 독일인들은 메르켈에게 ‘엄마’라는 별명을 붙였다. 지난 5월 20년 만에 시행된 인구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독일의 실제 인구는 예상보다 150만 명이나 적었다. 통계학자들은 2060년경에는 인구수가 현재 8,000만 명에서 7,000만 명 이하로 더 줄어들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독일의 다른 지표들도 살펴보자.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독일의 GDP는 총 1.5% 증가하는 데 그쳤다. 같은 기간 미국은 3% 성장을 기록했다. 경제학자들은 지나친 수출의존도가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한다. 독일 경영자들이 자국 제조업을 자랑스러워 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독일 제조업은 전 세계 지도자들의 부러움의 대상이다. 오바마 대통령도 독일의 기술투자에 대해 찬사를 보낼 정도다. 하지만 독일은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 때문에 산업을 견고히 지탱하기 위해선 부유한 해외 소비자들의 도움이 절실하다. 최고급으로 설계된 오디오 장비, 자동차, 그리고 중장비들은 다른 EU국가들에 수출된다. 때문에 메르켈 총리는 시급히 이런 국가들의 경제를 회복시켜야 한다. 하지만 수년간 지속된 경기침체 때문에 대다수 유럽인들은 새로운 BMW 차량이나 고가의 보쉬 Bosch 가전제품을 살 여력이 없다.

사실 일부 경제학자들은 유럽 내 메르켈의 강력한 영향력은 독일 경제력의 척도라기보단, 나머지 유럽 국가들의 어려운 상황을 반영한 산물이라고 설명한다. 런던 소재 연구소인 유럽개혁 센터(Center for European Reform)의 수석 경제학자 시몬 틸포드 Simon Tilford는 “유럽 위기의 아이러니는 위기 덕분에 독일의 힘이 엄청나게 커졌지만, 독일 스스로도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현 시점에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은 메르켈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메르켈이 (G8 같이) 비유럽 국가의 리더들과 함께 있을 땐 “그저 심각한 인구문제를 가진, 성장이 정체된 나라의 리더일 뿐인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메르켈의 과거를 고려했을 때, 그녀가-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리더’라는 사실은 고사하고-리더라는 사실만도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1년 백악관 장미 정원(White House Rose Garden)에서 그녀에게 대통령 자유 훈장(US 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수여했다(메르켈은 훈장에 관한 포춘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5월 늦은 아침, 필자는 차를 타고 베를린 동쪽으로 한 시간 정도를 달렸다. 유리 빌딩들과 복잡하게 이어진 교외를 지나 나무와 들판 사이로 난 1차선 도로가 나올 때까지 차를 몰았다. 그렇게 베를린에서 40마일 정도 떨어진 템플린 Templin이란 곳에 도착했다. 1989년 냉전시대의 종식과 소련 몰락의 시작을 알린 베를린 장벽 붕괴 전까지 공산주의 동독(Communist East Germany)의 심장이었던 곳이다. 호수와 숲에 둘러싸인 이 조용한 지방 마을에는 현재 약 1만7,000명이 살고 있다.

메르켈이 살던 시절, 템플린은 서독과 차단돼 있었다. 어린 메르켈을 장벽 반대편-루터교 목사인 그녀의 아버지는 메르켈이 아기였을 때 가족들을 데리고 동독으로 왔다-세상과 이어주는 유일한 고리는 이모가 서독에서 보내주던 생필품 꾸러미였다. 한 번은 조카를 위해 귀한 데님 청바지도 같이 넣어 보냈다. 하지만 메르켈은 학교에 갈 때 청바지를 입을 수 없었다. 서독 옷을 입는 것이 눈총을 받을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어린 시절 지인들은 메르켈을 소수의 친구들과만 어울리는 똑똑하고,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기억한다. 메르켈의 동창이자 템플린에서 소아과 의사로 일하는 카롤라 모크 Carola Mock는 “그녀는 조용했고,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고 회상했다.

정치수업은 레닌과 마르크스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교실에서 진행됐고, 아이들은 의무적으로 서독 자본주의의 사악함에 대해 배웠다. 메르켈은 러시아어 수업에서 두각을 나타냈고(지금도 여전히 러시아어를 잘 구사한다), 사회주의 청소년 단체 회원으로 활동했다. 메르켈의 중학교 수학 선생님이었던 한스 율리치 비스코 Hans-Ulrich Beeskow는 필자를 메르켈이 어린 시절 자주 가던 장소로 데려다 주며 “우리는 심지어 거수 경례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팔 동작을 흉내 내며 “내가 반 아이들 향해 ‘준비됐나?’라고 외치면, 아이들은 ‘언제든 준비됐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메르켈은 수천 명의 독일 청년들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동유럽에서 사회주의를 종식시켰던 1989년 11월 밤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당시 35세였던 메르켈은 국영 과학 아카데미(Academy of Science)에서 물리화학(physical chemistry)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침착하고 신중하며 책에 파묻혀 지내던 그녀는 무너진 장벽 위에서 축제를 벌이던 젊은이들 무리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 혁명의 밤, 메르켈은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했고 (정기적으로 하던) 사우나도 했다. 며칠 뒤에는 과학 콘퍼런스에 참여하기 위해 폴란드로 갔다. 콘퍼런스 주최측은 그녀가 베를린에서 벌어지고 있던 일에 동참하지 않은 것을 의아하게 여겼다.

당시 메르켈을 알았던 지인들은 그녀가 정계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은 우연에 가깝다고 말한다. 비스코는 “정계로 진출한 동기 중 하나는 취업을 위해서였던 것 같다. 통일 후 과학 아카데미가 해체되면서 메르켈은 실업자가 됐다”고 말했다. 동독 최초이자 유일한 민주주의 정부는 메르켈을 대변인으로 영입했다. 그리고 메르켈은 회의 참석을 위해 서독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정부 관리들, 기자들과 친분을 쌓아 통일 독일정부에서도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현재 정부 부대변인이자 당시 기자로 활동하던 게오르그 스트레이터 Georg Streiter는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동료들과 메르켈이 함께 참석했던 만찬을 떠올리며 “그녀는 외계인 같은 취급을 받았다”고 말했다. 참석자들이 그녀에게 사회주의 동독 생활에 대한 질문세례를 퍼부었기 때문이다.

1990년 독일이 통일된 후 16년간 총리를 역임했던 헬무트 콜 Helmut Kohl은 메르켈을 그의 첫 번째 여성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이후에는 환경부 장관직을 맡겼다. 당시 콜의 대변인이었던 안드레아스 프릿젠쾨터 Andreas Fritzenktter는 “그는 동독출신이 필요했다. 또 여성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녀는 서독에 대한 일말의 동정만 표해도 비밀경찰에 끌려가 엄중한 조사를 받던 은둔 국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수수한 외모에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메르켈이지만 남성 위주의 정치판에서는 처음부터 강하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해야 했다(최근 그녀는 독일 여성잡지 브리기티 Brigitte와의 인터뷰에서 남자들이 가장 부러운 점은 장작을 패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프릿젠쾨터는 “그녀는 외모에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건 심지어 지금도 그렇다”고 말했다. 그는 각료회의에서 메르켈의 멘토 콜이 그녀를 ‘경험 없는 정치가’라고 호되게 비난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그는 “1989년 메르켈을 처음 봤을 땐 그녀가 뛰어난 리더가 되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스펀지처럼 정보를 빨아들였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메르켈이 배울 수 없었던 한 가지 교훈이 있다면 ‘유럽 경제 문제 해결방안’이다. 지난 5월 어느 아침, 필자는 브뤼셀 EU 본부에서 메르켈이 어떻게 회의를 관장하는지 관찰했다. 모든 국가 정상들이 하루 동안 지속되는 정상회의를 위해 그곳에 모였다. 의제는 ‘조세개혁’과 ‘재생가능 에너지’로 최근 상황과는 다소 동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 메르켈에게 중요한 문제는, 어떤 EU 회원국도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채 재임에 성공하는 것이었다.

다른 국가 정상들과 대화를 나누며 회의실을 돌아다닐 때, 그녀의 모습은 회의실에서 가장 중요한 리더일 뿐만 아니라 관록 있는 정치가였다. 미숙한 위기 관리 능력에 뿔이 난 유권자들은 수많은 정치 리더들을 교체했다. 전 영국 수상 고든 브라운 Gordon Brown, 전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스 사르코지 Nicolas Sarkozy, 이탈리아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Silvio Berlusconi가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적어도 현재의 독일 경제는 여전히 선전 중이기 때문에 가을 총선에서 메르켈이 그들과 같은 운명에 처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독일 리더에게 가해지는 부담감은 여전히 막중하다. 최근 한 기자가 메르켈 총리에게 “몇 년간 유로 위기를 경험했는데, 조요한 시간은 어디서 보내나”라고 물었다. 그녀는 “홀로 집무실에서 보낸다”고 답했다. 그녀는 9월 총선이 끝난 뒤 다시 조용한 집무실로 돌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곳에서 위기에 처한 유로 국가들을 위한 구제 정책을 기획하며, 자신의 방식이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도 효과가 있다는 점을 증명하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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