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렉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하이엔드 워치 브랜드다. 롤렉스는 다른 하이엔드 워치 브랜드들처럼 다양한 고기능성 장치를 만들지는 않지만, 보유하고 있는 기능들에 대해선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한다. 롤렉스가 고안한 여러 시계 기술들은 세계 시계산업계를 이끈 촉매제 역할을 했다.
김강현 기자 seta1857@hmgp.co.kr
하이엔드 워치를 두고 흔히 하는 말로 ‘손목 위에 자동차 한 대를 얹고 다닌다’는 얘기가 있다. 그만큼 가격이 비싸기 때문이다. 웬만한 소득수준으로는 구매할 엄두조차 나지 않다 보니 일반 소비자들에게 하이엔드 워치 브랜드는 그 이름부터 생소한 경우가 많다.
자기만족을 위해 시계를 수집하는 컬렉터들이라면 모를까, 결혼 등 특별한 계기를 통해 하이엔드 워치를 구입하게 되는 일반 소비자들에게 이는 썩 좋은 현상이 아니다. 명품이라는 것 자체가 보통 자기과시를 위한 수단으로 쓰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과시욕이 강한 우리나라 소비자들에겐 특히 그렇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하이엔드 워치 브랜드 롤렉스는 그런 점에서 매우 특별한 브랜드다. 보통 하이엔드 워치 시장에서 특정 브랜드가 시장지배력을 행사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롤렉스는 그렇게 하고 있다. 롤렉스라는 이름이 우리나라에서 미치는 영향력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롤렉스의 가격 정책이나 공급량 조정은 우리나라 하이엔드 워치 시장 전체에 영향을 줄 정도로 그 힘이 막강하다.
롤렉스는 한스 빌스도르프 Hans Wilsdorf에 의해 창립됐다. 1882년 독일 바이에른 쿨름바흐 지역에서 태어나 고아로 자란 한스 빌스도르프는 청년 시절 스위스 라쇼드퐁 지역 시계 제조업체에서 일하면서 전문 시계 지식과 기술을 배우게 된다.
한스 빌스도르프는 타고난 경영인이었다. 그가 24살이 되던 1905년. 그는 독립된 시계 사업을 하기 위해 영국 런던으로 이주, 그곳에서 빌스도르프&데이비스 Wilsdorf & Davis라는 회사를 세우고 시계 수입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이 사업을 계기로 자체 손목시계 제작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된다. 회사명에 들어간 데이비스는 사업 파트너이자 자신의 처남인 알프레드 데이비스 Alfred Davis의 이름에서 따왔다.
회사명이 ‘롤렉스 Rolex’로 변경된 건 자체 손목시계 제작을 코앞에 둔 1908년의 일이었다. 한스 빌스도르프는 이제 자체 손목시계 제작을 시작하는 만큼 회사에도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떤 언어로나 발음할 수 있고 기억하기 쉬우며 짧고 인상적인 이름을 원했다.
하지만 작명은 의외로 쉽지 않았다. 한스 빌스도르프는 며칠 동안 수백 가지 이름을 떠올렸지만 그 어떤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어느 날, 런던의 치프사이드 거리를 달리던 합승마차 2층에서 그는 신의 계시처럼 롤렉스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전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롤렉스라는 이름은 이렇게 세상에 태어났다.
한스 빌스도르프는 롤렉스라는 이름에 매우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롤렉스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모든 제품들이 ‘품질 면에서 최고’라는 찬사를 받길 바랐다. 오너의 이 같은 뜻에 따라 롤렉스사는 처음부터 무브먼트의 품질 향상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같은 시기, 세계 시계제조사들의 관심은 크로노미터 Chronometer의 정확도 향상에 쏠려 있었다. 크로노미터는 선박 항해 때 사용되는 정밀한 시계로, 외부의 극한 환경 요인을 극복할 수 있어야 했고, 특히나 높은 정확도가 요구됐다. 여러 시간대를 옮겨 다니는 무역선박들의 경우, 배의 진동이나 온도 변화에 따른 시간 오차 때문에 선원 전체의 생명이 위협 받은 사례가 종종 있었다. 현재는 위성시계의 등장으로 이런 위험이 상당 부분 감소했지만 당시만 해도 크로노미터의 정확성이란 배 전체의 운명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당시 많은 시계 브랜드들이 자사 제품의 정확성을 자랑했지만 이를 공식 기관에 의뢰해 증명해 보이는 곳은 없었다. 혹여나 안 좋은 결과가 나올 경우 브랜드 이미지에 치명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롤렉스는 달랐다. 한스 빌스도르프는 자신 있게 비엔 공식 시계 평가 센터 Official Watch Rating Centre in Bienne에 자사 크로노미터의 품질인증을 의뢰했고, 1910년 스위스 공식 크로노미터 인증을 획득했다. 손목시계 역사상 최초의 인증이었다.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롤렉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영국은 전쟁 및 전쟁 복구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을 세수로 충당해야 했고, 이를 위해 명품 업체 및 수입사들에게 많은 세금을 부과했다. 이는 롤렉스가 영국을 떠나 스위스로 이전하는 계기가 됐다. 롤렉스는 1919년 시계의 도시로 명성이 높았던 스위스 제네바로 본사를 옮기고, 1920년 기업 설립 요건이 상대적으로 쉬웠던 비엔 Bienne에서 몽트레 롤렉스 S.A. Montres Rolex S.A.로 상표 등록을 했다.
롤렉스는 조금 특별한 브랜드다. 보통 하이엔드급 워치 브랜드가 갖춰야 할 3대 요소로 역사, 기술력, 디자인을 꼽는다. 톱 브랜드 중에는 2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브랜드가 즐비하다. 이들 대부분은 투르비용, 미닛 리피터, 퍼페추얼 캘린더 등 온갖 고기능들을 선보이고, 여러 하위 컬렉션을 두어 디자인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롤렉스는 크로노미터 인증부터 현재까지 겨우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졌음에도 하이엔드 워치 브랜드로 상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 대부분의 하이엔드 워치 브랜드가 추구하는 몇몇 고기능들은 아예 선보이지도 않았지만 전문가들은 롤렉스에 주목한다. 컬렉션 종류도 오이스터 Oyster와 첼리니 Cellini 두 종류로, 이들 컬렉션 하위에 여러 라인이 있긴 하지만, 다른 브랜드들에 비해 디자인이 그다지 다양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롤렉스는 하이엔드 워치 브랜드로 한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 그것도 매우 특별한 브랜드로 대접받고 있다. 이는 창립자였던 한스 빌스도르프의 의지가 그랬던 것처럼, 롤렉스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모든 제품들이 가진 ‘품질의 우수성’에 기인한다. 롤렉스는 시계의 기능을 평가하는 세계 유수의 테스트에서 항상 수위권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롤렉스를 설명하는 수식어 또는 키워드로 유독 ‘정확한’ ‘안정적인’ ‘견고한’ 등이 많이 붙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롤렉스는 여타 브랜드들처럼 많은 기능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술력으로는 세계 최고로 꼽힌다. 롤렉스는 많은 기능을 개발하느라 힘을 분산시키지 않는다. 대신 자사가 보유한 기술에 대해선 세계 최고라고 자부한다. 기술의 종류는 적지만 폭이 깊다는 얘기다. 현재까지 낸 특허만 400여 건 이상으로, 이 중에는 현대 기계식시계 기능의 핵심기술로 꼽히는 것들도 들어 있다.
롤렉스가 세계 시계사에 남긴 가장 큰 족적은 방수·방진 시스템의 개발이다. 롤렉스는 1926년 이 기술을 처음 선보였다. 롤렉스는 이 기술이 적용된 시계에 아직까지도 ‘오이스터’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이는 시계 케이스를 완벽히 밀폐해 보호한다는 의미다. 오이스터 컬렉션에 포함된 데이트저스트 Datejust, 데이-데이트 Day-Date 등의 하위 라인에는 방수·방진 기능이 모두 기본으로 장착되어 있다.
1931년에 개발된 ‘360도 회전’ 퍼페추얼 무브먼트 Perpetual Movement 역시 세계 시계산업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획기적인 발명으로 평가 받는다. 퍼페추얼 무브먼트의 개발 자체로만 보자면 롤렉스가 최초는 아니다. 이미 1700년대 말에 오토매틱 와인딩 시스템 을 적용한 회중시계가 등장한 바 있다. 하지만 회중시계 특성상 오토매틱 와인딩 시스템이 잘 작동하지 못하면서 1800년대부터는 사장된 기술로 치부되었다. 시계가 흔들리게 되면 태엽이 자동으로 감겨 동력을 채워주는 것이 오토매틱 와인딩 시스템인데,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회중시계는 많이 흔들릴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손목시계용 오토매틱 와인딩 시스템을 처음 고안한 사람은 영국의 시계 제작자 존 하워드 John Harwood였다. 그는 이미 1924년 9월에 관련 특허를 등록한 상태였다. 롤렉스가 퍼페추얼 무브먼트를 특허로 등록한 건 1933년 3월의 일이다. 두 주체가 거의 동일한 특허 내용을 등록할 수 있었던 건 현재 같은 전산시스템이 없어 특허 간 확인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특허 출원이 존 하워드보다 늦었음에도 현재 많은 사람들은 손목시계용 퍼페추얼 무브먼트의 원조를 롤렉스라 여기고 있다. 현재 기계식시계의 오토매틱 와인딩 매커니즘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게 롤렉스이기 때문이다.
존 하워드의 퍼페추얼 무브먼트는 ‘완벽한’ 퍼페추얼 무브먼트라고 보기 어려웠다. 퍼페추얼 무브먼트의 원리는 손목 움직임에 따른 관성으로 시계 안에 장착된 로터가 자동으로 태엽을 감아주는 것이지만, 존 하워드의 퍼페추얼 무브먼트는 기술적 한계로 회전각이 130° 정도밖에 안돼 문제를 안고 있었다.
존 하워드의 퍼페추얼 무브먼트 손목시계는 회전각이 작아 손목의 움직임이 로터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이에 시계가 동력을 얻지 못해 멈춰버리는 현상이 자주 나타났다. 자동 동력제공의 장점이 사라지고 오히려 사람이 따로 시간을 내 시계 몸체를 빙빙 돌려줘야 해서 더 번거롭기까지 했다.
하지만 롤렉스에서 만든 퍼페추얼 무브먼트는 360° 회전 가능한 로터를 달고 있었다. 말 그대로 Perpetual(영원)한 무브먼트의 등장인 셈이었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오토매틱 와인딩 무브먼트들은 전부 이 시기에 나온 롤렉스 퍼페추얼 무브먼트의 손자뻘이라고 할 수 있다.
롤렉스는 세계 시계사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브랜드이다. 롤렉스가 방수·방진 시스템을 개발한 까닭에 시계는 물과 친해질 수 있었고, 이는 다이버시계가 나오게 된 계기가 되었다. 완벽한 손목시계용 퍼페추얼 무브먼트의 개발은 기계식시계의 자존심이라고까지 불리고 있다. 기계식시계보다 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전자시계조차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전지를 갈아줘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퍼페추얼 무브먼트를 장착한 기계식 시계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편의성 면에서는 전자시계보다 더 뛰어나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