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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마지막 선택

THE MYSTERY OF CLEOPATRA'S DEATH

기세등등한 로마의 통치자들을 단숨에 사로잡으며 ‘왕 중의 여왕’이란 칭호를 얻은 마성의 여인 클레오파트라. 마케도니아의 마지막 여왕답게 극적인 삶을 살다 간 그녀는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여전히 ‘핫’한 존재다. 그런 그녀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 역시 흥미롭긴 마찬가지. 독사를 풀어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가설일 뿐 그녀가 택한 죽음의 방식은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잘알려졌다시피 클레오파트라는 역사 속의 그 어떤 여인보다 격동의 삶을 살았다. 그녀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셋째 딸(클레오 파트라 7세)로 태어나 18세에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 공동 파라오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남편을 비롯한 형제들과의 권력다툼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권력 기반인 그리스계의 외면 등으로 왕좌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러던 기원전 48년 이집트에 온 로마제국의 지배자 카이사르와의 협상에 성공, 반대세력을 물리치고 다시 왕좌를 차지한다. 스물이 갓 넘은 클레오파트라가 50대에 이른 카이사르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이용했다는 갖가지 유혹의 비법들은 지금도 널리 회자되고 있을 정도다.

카이사르가 암살로 생을 마감한 뒤 기원전 42년에는 로마의 차기 지배자 안토니우스와 손을 잡는다. 3년 후 안토니우스와의 결혼에 성공하면서 남편으로부터 이집트를 비롯해 키프로스, 리비아, 시리아 등의 드넓은 영토를 인계받기도 했다.

그렇게 한동안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졌으나 기원전 31년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를 하면서 그녀의 삶은 다시 난기류에 휘말린다. 클레오파트라 커플(?)은 옥타비아누스에 맞서 그 유명한 악티움 해전을 결행했지만 결과는 참패로 끝이 났다.

그 직후인 기원전 30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결국 자살을 통해 생을 마감한다. 로마의 포로가 되어 모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 것. 이때 그녀의 나이 39세.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클레오파트라의 일생이다.





피도, 상처도 없는 조용한 죽음

클레오파트라의 드라마틱한 일생 가운데 가장 신비로운 부분은 바로 죽음의 순간이다. 이를 이야기하려면 일단은 당시 정황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쓴 고대 로마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남겼다.

“악티움 해전에서 패한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을 위해 만들어 둔 왕실묘지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았다. 시녀들과 보물로 가득한 무덤으로 숨어든 그녀는 문에 단단한 방어벽을 쳤다. 당시 마케도니아의 여느 무덤처럼 문은 한번 닫히면 다시 열기 어려웠다. 안토니우스의 시신도 쇠줄과 밧줄로 몸을 감은 채 묘지 위로 올라가 창문을 타고 클레오파트라의 무덤으로 들어가야 했다.”

이 내용을 뒷받침하는 연구결과도 있다. 지난 2009년 그리스의 해리 잘라스 박사팀이 클레오파트라의 궁전이 있었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해저 유적에서 높이 7m, 중량 15톤의 화강암 탑문(pylon)을 발견한 것. 연구팀은 이것이 클레오파트라의 무덤 입구일 것이라 추정했다. 이처럼 무거운 돌이 파도에 휩쓸려 왔을 리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클레오파트라는 정말로 자신의 무덤 속으로 걸어 들어가 자살을 단행했을까.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그녀의 죽음과 관련해 알려진 상황, 그래서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은 대략 이렇다.

아름다운 옷과 보석으로 치장한 클레오파트라가 꽃과 황금으로 장식된 침대에 누운 채 일부러 풀어놓은 독사에 물려서 목숨을 끊는다. ‘내가 죽으면 (앞서 죽은) 안토니우스와 함께 묻어 달라’는 편지를 남긴 채. 그녀의 사체에는 혈흔이나 상처도 없으며, 발치에 그녀를 따라간 시녀들이 쓰러져 있다. 여왕의 죽음답게 사뭇 극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지금껏 많은 사람들은 클레오파트라를 살해한 것이 북아프리카의 독사라고 여겼다. 그녀의 죽음을 그린 옛 그림들을 봐도 대체로 반라 상태로 누운 여왕의 젖가슴을 독사가 무는 자극적 장면이 등장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에서도 마지막에 클레오파트라가 독사 2마리에 물려 죽는 장면이 나온다. 1마리는 가슴을, 다른 1마리는 팔을 문다. 이렇듯 독사가 클레오파트라를 죽인(?) 범인으로 지목된 데는 다음과 같은 플루타르코스의 언급이 큰 영향을 미쳤다.

“한 농부가 과일 광주리를 들고 클레오파트라가 피신한 무덤 앞에 나타났다. 문지기들이 그게 뭐냐고 묻자, 농부는 광주리를 열어 무화과를 내보이며 먹어보라고 권했다. 문지기는 웃으며 그를 통과시켰는데 광주리 속에 뱀이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정확한 진실은 알 수 없는 상태다. 플루타르코스조차 “현장에서 뱀은 1마리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뱀의 흔적만이 남아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름답게 죽는 법

클레오파트라는 사실 뱀이 아닌 독약을 이용해 자살했다는 주장도 있다. 지난 2010년 독일 트리어대학의 고대사학자 크리스토프 섀퍼 교수가 고대문헌과 독극물 학자들의 조언을 근거로 그 같은 의견을 제시한 것.

당시 섀퍼 교수는 코브라와 같은 독사가 인체에 치명적이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으며, 단시간에 죽음에 이르게 하지도 못한다고 지적했다. 독사에 물릴 경우 사망에 이르기까지 수시간이 걸리고, 눈을 포함해 신체의 여러 부분이 마비되는 증상이 나타난다는 설명과 함께였다. 이는 클레오파트라가 특별한 고통이나 상처 없이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숨을 거뒀다는 기록(?)과 맞지 않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밖에 독사가 범인이 될 수 없는 근거는 또 있다. 클레오파트라는 당시 2명의 시녀와 함께 자살을 감행했다고 전해지는데, 독사로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설정이다. 독사는 한번 물었을 때 자신이 가진 독을 거의 모두 뿜어내기 때문이다. 일단 물고 나면 독액이 유실돼 치사율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한두 마리의 독사로 3명을 절명시키기는 것은 어폐가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녀가 독이 묻은 바늘이나 칼 같은 도구를 사용했다고 여기는 학자들도 많다. 미국의 작가 조지아 브래그 역시 저서 ‘옛사람들의 죽음 사용 설명서’에서 이와 유사한 견해를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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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약 매매는 당시 이집트에서 큰 사업의 하나였다. 부자(附子)나 사리풀, 독미나리 등의 독초를 지역 소매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다. 클레오파트라의 팔에서 발견됐다는 뭔가에 찔린 흔적 2개는 독사에 물린 자국이 아니라 독이 묻은 머리핀에 의해 생긴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일부 학자들은 고통을 덜기 위해 독초와 함께 아편을 혼합해 사용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실제로 클레오파트가 독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지식도 해박했다는 점이다. 법의학자 문국진 박사는 저서 ‘명화와 의학의 만남’에 이렇게 적시했다.

“언제나 미(美)를 추구하던 여왕은 잠든 후에도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고통 없이 죽는 비법을 찾고자 백방으로 노력했고, 직접 생체실험까지 했다.”

죄인을 처형할 때 독약을 투여토록 하고, 어떤 독약이 고통 없이 죽는지를 관찰했다는 것이다. 또한 동식물의 독액에 대해 연구하면서 실험동물에게 독액을 투여한 뒤 그 증상과 사망에 이르는 양상을 세밀히 살펴봤다고도 전해진다.

이러한 일련의 실험을 통해 클레오파트라는 효과적이면서 육체의 추악한 변형을 피할 독약을 구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연탄가스 중독?!

클레오파트라의 사망을 둘러싼 다양한 가설 중에는 독가스, 정확히 말해 일산화탄소(CO) 중독에 의해 숨졌다는 것도 있다. 시신이 발견된 장소의 문이 완벽히 봉해져 있었다는 기록이 이 가설에 설득력을 더한다. 문국진 박사는 ‘명화와 의학의 만남’에서 이 주장을 법의학적으로 해석한 바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사망 장면을 묘사한 글을 보면 여왕은 침대 위에서, 한 시녀는 그 발밑, 또 다른 시녀는 방문을 향해 쓰러져 죽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일산화탄소 중독을 연상케 한다. 여럿이 연탄가스에 중독사했을 때 발견되는 특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처럼 기지 넘치는 여왕이라면 세 사람이 동시에 자살하는 데 독사보다는 일산화탄소를 이용했을 가능성을 높게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문 박사는 로마군이 현장에 도착해 여왕의 죽음을 확인한 결과, 뱀은 물론 독을 묻힌 핀같은 것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는 기록을 들어 일산화탄소 중독설에 방점을 찍었다. 아울러 그는 “여왕이 독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탄(炭)이 연소할 때 발생하는 유독가스의 존재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며 “안토니우스의 장례를 구실로 탄과 연소 도구를 쉽게 들여올 수 있었다고 본다”고 전했다.

이외에도 아예 클레오파트라가 자살이 아닌 타살됐다는 설이 있다. 옥타비아누스가 죽여 놓고 클레오파트라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려 자살했다고 발표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 또 특유의 ‘요부(妖婦)’ 이미지에 의한 추론인 듯 에이즈 감염 등에 의한 병사(病死)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두가 글자 그대로 가설일 뿐. 확실한 증거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지난 2,000년간 남자의 일생을 망친 요부 혹은 세기의 팜 파탈(femme fatale)로 평가된 클레오파트라. 그녀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은 이제 조금씩 변해가는 중이다. 강대국 로마에 맞서 이집트를 지키고자 애쓴 의지의 여왕이자 탁월한 전략가로서의 면모가 부각되고 있다.

그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최초로 그리스 문화에 젖어 있던 왕가의 풍습을 깨고 이집트어를 배워서 사용했으며, 궁전에서 열리는 토론회에 직접 참가할 만큼 학문과 예술에 열정적이었다. 이런 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아버지의 영광’이라는 뜻을 가진 그녀의 이름이 주는 울림은 결코 적지 않다. 앞으로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역사의 재평가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그녀의 죽음에 대한 실마리가 풀리기를 기대해본다.



매부리코의 팜 파탈

프랑스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도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 속에는 클레오파트라의 미모가 그만큼 뛰어났으며, 그 미모를 무기로 여러 남성을 유혹해 야심을 채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클레오파트라는 그다지 미인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지금의 기준으로는 그렇다는 말이다. 이는 클레오파트라의 초상이 새겨진 고대 화폐나 유적지에서 발굴된 조각상 등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살이 찐 커다란 얼굴에 매부리코를 하고 있는데, 다소 남성적인 생김새에 가깝다. 그래서 몇몇 학자들은 클레오파트라가 미인은커녕 추녀에 가까웠으며, 근친혼 제도로 인한 기형에 시달렸을 가능성까지 제기한다.



무덤은 어디에?

고대 로마 역사서에는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의 유언대로 안토니우스 옆에 묻혔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그들의 무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지난 2009년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 한 고고학 연구팀에 의해 지목된 것. 연구팀은 이집트 북부도시 알렉산드리아 서쪽의 타포시리스 마그나 신전 인근에서 클레오파트라 커플이 묻혔을 것으로 보이는 여러 비밀통로로 이뤄진 무덤을 발견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이름이 새겨진 동전 20여개와 안토니우스의 얼굴로 추정되는 석고가면 등 유물 몇 가지도 출토됐다.

근처의 한 묘지에서는 금박을 입힌 미라까지 나왔다. 이런 미라는 대개 왕족 옆에서 발견되므로 신전의 무덤에 매장된 주인공이 왕이나 왕비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렸다. 학자들은 현재 신전 지하를 파고들어가며 무덤의 주인공을 찾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파퓰러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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