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그거 아세요? IT가 인텔(Intel)과 타이완(Taiwan)의 준말이라는 거.”
7일(현지시각) 대만 타이베이에서 폐막한 동아시아 최대 정보기술(IT) 박람회인 ‘컴퓨텍스 2024’에서 연단에 오른 팻 갤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가 기조연설에서 참관객들을 향해 던진 농담이다. 좌중을 웃음 바다로 만든 이 말은 미국 대표 반도체 기업인 인텔의 수장조차 인공지능(AI) 기술로 재편되는 반도체 업계에서 대만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지를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실제 올해 컴퓨텍스는 흡사 대만 IT 업계의 부흥회를 떠올리게 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지난해에도 컴퓨텍스를 찾아 대만인들의 관심을 한몸에 이끌어냈는데 올해는 한발 더 나아갔다. 황 CEO는 행사에 앞서 지난달 29일 모리스 창 TSMC 창업자, 차이밍제 미디어텍 회장, 린바이리 콴타컴퓨터 회장 등을 불러 모았다.
내로라하는 기업가들이 모였지만 이들이 모인 곳은 호화로운 식당이 아니라 대만인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야시장이었다. 타이베이에 있는 닝샤 야시장의 한 식당 원탁에 둘러앉은 이들의 모습에 모든 대만인들의 눈과 귀과 쏠릴 수밖에 없었다. 한때 PC, 서버 관련 장치 행사로 이름을 높였던 컴퓨텍스는 IT 중심이 모바일로 옮겨오며 다소 힘을 잃었지만, 챗GPT로 AI 컴퓨팅이 주목 받자 다시 생명력을 얻고 있다. 엔비디아, TSMC, 콴타컴퓨터 등 대만과 연관된 기업들은 이제 컴퓨텍스를 구심으로 다시 세를 불리며 협력 관계를 다지고 있다.
차세대 AI 컴퓨팅 시장이 이제 막 열리는 중요한 시기를 맞아 이들의 협력은 더욱 견고해지는 모습이다. 예컨대 최근 수천만원 가격에도 없어서 못산다는 서버용 AI 칩의 경우 엔비디아, TSMC, 콴타컴퓨터가 각자의 역량을 바탕으로 톱니바퀴 같은 협업을 통해 생산된다. 엔비디아가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설계하고 소프트웨어를 만들면, TSMC가 초정밀 파운드리 공정을 통해 칩을 제조한다. 콴타컴퓨터는 이를 받아 서버를 설계·제조해 고성능 AI 서버가 생산되는 식이다. 이들 기업의 긴밀한 협력은 급성장하는 AI 산업의 인프라를 좌우하는 핵심 기술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국가의 주요 기업인들이 정부라는 구심 없이도 모이자 정부도 기쁘게 화답했다. 라이칭더 신임 대만 총통은 행사 개막식에서 “과학기술계 모든 사람이 수십 년 동안 노력해 대만을 AI 혁명의 구심점으로 만들었고, 대만을 이름 없는 영웅이자 세계의 기둥으로 만들었다”고 자신했다. 그러면서 “대만을 AI 스마트섬으로 만들겠다”며 “이것은 개념적 목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미래”라고 강조했다. 정부 없이도 기업인들이 먼저 뜻을 맞춰 산업의 미래를 도모하고 협력을 다지는 모습은 한국에서는 낯선 풍경이기도 했다.
대만의 총통과 주요 기업인이 친밀감을 다지는 가운데 반도체 산업 2위 강국 한국은 자연히 관심의 중심에서 멀어졌다. 황 CEO는 연초 열린 북미최대 IT 전시회 CES에서만 해도 삼성전자 등 국내 기업들을 치켜세웠지만 이번에는 최대한 한국 기업 언급을 자제하는 모습이었다. 황 CEO는 4일 진행된 기자 간담회에서 한 외신 기자가 “삼성전자와 마이크론의 최신 고대역폭메모리(HBM) 품질 인증이 제대로 안되고 있는거 아니냐”는 공격적인 질의를 하자 그제서야 사실이 아님을 확인해줬다. 리사 수 AMD CEO 역시 기자간담회에서 삼성전자와 3㎚(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정에서 협력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답을 회피했다.
이전까지는 행사 내내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행사 기간 진행된 부스 투어에 앞서 연내 한국 방문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는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지금은 대만에 와있다”며 비 대만 기업에 대한 언급을 최소화했다. 이후 부스 투어 중간에도 삼성전자와 5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3E) 파트너십을 묻는 질문에 “당신은 이 행사에 집중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I think you need to more focus on this)”라며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한 것이 대표적이다. 반면 같은 행사에서 TSMC 등 대만 기업에 대해서는 “TSMC는 엄청나다. 엄청난 기술을 갖고 있으며 직업 정신도 투철하고 유연하다”며 “TSMC 위아래로 형성돼 있는 공급망 생태계는 대단하며 우리는 그들과 25년 이상을 함께 일해왔다”고 찬사를 쏟아냈다.
대만 업계가 똘똘 뭉치는 모습을 보며 현장에서 만난 국내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는 부러움과 아쉬움이 동시에 묻어났다. AI 훈풍의 과실을 따먹기 위해 민간이 똘똘 뭉친 것과 달리 국내에서는 미국·일본·유럽 등이 대규모 반도체 생산 시설을 유치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내세우는 보조금 제도가 테이블에 오르지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이보다 지원 규모가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 ‘K-칩스법’도 올해 말 일몰을 앞두고 꾸준히 일몰 연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여전히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올해 행사의 주인공은 두개다. 누구나 알듯 AI 그리고 대만이다. 글로벌 행사로 도약하려는 행사겠지만 모든 주요 인사들이 연설이나 인터뷰에서 대만 기업뿐 아니라 대만인을 의식하고 칭찬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느낌이 들었다"며 “AI로 반도체 업계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우리나라도 분명 배울 점이 있고 바뀌어야 할 점이 있다는 걸 시사해주는 행사”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