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INTERVIEW/ 정희경 타임포럼 대표 인터뷰

“세계 시계시장은 지금 혁신 중 국내 메이커도 성장기회 찾아야”

지난 10월 우리나라 최고 시계 전문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정희경 타임포럼 대표를 서울 압구정 까르띠에 메종에서 만났다. 정희경 대표는 최근 시계 시장의 변화와 업계 트렌드, 국내 시계 브랜드에 대한 평가 등 방대한 이야기를 명쾌히 풀어내 주었다.
김강현 기자 seta1857@hmgp.co.kr


정희경 타임포럼 대표는 국내 시계 업계에서 상징적인 존재다. 그가 쓴 ‘시계이야기’는 출판된 지 3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시계마니아들 사이에서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꼽히고 있다. ‘시계이야기’ 이전에는 국내에 시계 전문 서적이라 할만한 것 자체가 없었고, 이후에 양산된 시계 관련 책들은 시계이야기의 보충이나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마저 나돌 정도다.

그가 시계 업계에 미치는 영향력도 상당하다. 미셸 파르미지아니 등 유명 워치메이커부터 각 브랜드 회장, CEO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인맥을 자랑한다. 우리나라에서의 영향력은 더 막강하다. 정희경 대표와 인터뷰 일정이 잡힌 이후 포춘코리아에는 여러 시계 브랜드로부터 물밑 접촉이 이어졌다. 인터뷰에 자사 브랜드가 최대한 많이 노출되길 바라는 의도였다. 그의 평가 한 마디에 시계 브랜드들의 희비가 엇갈린다는 세간의 이야기가 아주 과장된 것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최근 세계 시계 시장의 변화와 업계 트렌드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
지난 3~4년간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시장 규모가 커지면서 시계 브랜드들도 이쪽 시장에 대단히 신경을 많이 쓰는 모습이다. 리치몬트그룹이 2013년부터 홍콩에서 아시아판 고급시계박람회인 워치스 앤드 원더스 Watches & Wonders 를 개최하기 시작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각 메이커들은 시계 제작에 있어서도 아시아인들의 기호를 많이 반영하기 시작했다. 일단 사이즈가 작아졌다. 지름 45mm 이상의 오버 사이즈 열풍이 시들고 40mm 전후의 지름에 두께가 얇아진 시계가 유행하고 있다. 금과 보석으로 치장한 시계들도 부쩍 늘었다. 기술적인 부분보다 공예적인 측면에 더 치중하는 모습이다.


시계 업계의 기술 평준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동의하는가?
동의한다. 지난 몇 년간 여러 시계 브랜드 공장을 다녀봤다. 거기서 느낀 건 자동화 공정 도입 등 매뉴팩처의 현대화가 굉장히 많이 진행됐다는 점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기술 평준화를 의미한다. 물론 브랜드에 따라 여전히 수공예 작업을 고집하고 있는 과정도 있다. 기요셰 작업 등이 그것이다. 어떤 브랜드에선 이들 과정에 아직까지도 백여 년이 넘는 수공예 장치만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장인의 손을 탔다는) 상징적인 의미만 가질 뿐이다. 중요 부품 제조 시에는 컴퓨터나 레이저 기술 등을 사용한다. 이런 현대화 과정의 도입은 정밀 측정을 가능케 하고 부품 오차를 나노밀리그램 수준으로 줄여주는 장점을 가진다.


기술 평준화에 따라 제조 현장 및 브랜딩 활동에서의 변화도 상당할 것 같다.
시계 업체들이 산하의 부품 공장을 집약하고 또 고도화하고 있다. 생산 공정의 효율화나 시스템화를 위해서다. 롤렉스 같은 브랜드가 대표적이다. 시스템화를 빨리 구현한 회사들이 확실히 더 큰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기술 평준화가 이뤄지다보니 시계 업체들은 기술력을 내세웠던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공예적인 측면을 많이 강조하는 추세다. 과거엔 투르비용, 퍼페추얼 캘린더 등의 기능을 장착한 모델들이 대부분 1억 원을 상회했다. 2005년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가격이 많이 내려 1억 원 이하의 시계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컴플리케이션 제조 기술이 대중화 되다 보니 공급이 늘었기 때문이다. 특정 기능으로 기술력을 과시하기 어렵게 됐다는 얘기다.

그래서 하이엔드급에선 타 브랜드와 차별화를 꾀하기 위해 디자인과 예술적인 부분을 더 강조하고 있다. 조각, 보석 세팅, 에나멜 등 여러 고급 기법을 활용해 부가가치를 높이는 식이다. 물론 이런 방식이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17~19세기 시계들을 보면 당대의 공예기술이 모두 투입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최근 패션 등 다른 분야에서 시계 산업으로 뛰어드는 브랜드도 많은 것 같다.
패션 브랜드의 월담은 1989년 캘빈클라인을 시초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후에 아르마니나 구찌 같은 곳에서도 시계를 내놓았다. 이른바 패션시계라고 불리는 시계들이다. 펜디, 베르사체, 발렌티노, 페라가모 등은 비교적 최근에 뛰어든 업체들이다. 이들 업체 중 상당수는 시계를 패션의 한 아이템으로만 보고 접근한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외관 디자인에만 신경을 쓰고 시계의 핵심 장치인 무브먼트 등은 전문 제조사의 것을 사다 쓴 게 대부분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무래도 평가가 썩 긍정적이지 못했다.

반면 에르메스나 샤넬 등의 브랜드는 굉장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샤넬은 오데마 피게 산하 르노 에 파피에서, 에르메스는 파르미지아니 산하 보셰에서 독점 무브먼트를 개발하는 등 핵심 기술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또 두 브랜드 모두 샤넬다운, 또 에르메스다운 독자적인 디자인 세계를 구축하면서 더욱 가치를 높이고 있다. 패션 부문의 강력한 브랜드 명성을 시계 산업에서도 충분히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패션 브랜드보다 훨씬 이전에 시계 산업에 뛰어든 주얼리 브랜드들의 활약도 대단하다. 까르띠에와 반클리프 아펠이 대표적이다. 반클리프 아펠은 주얼리 브랜드로서의 정체성을 그대로 반영한, 특히 시적인 감수성을 많이 부각시킨 포에틱 컴플리케이션 시계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까르띠에는 자사 무브먼트가 30여 개가 넘을 정도로 기술적인 면에서 장족의 발전을 보였다. 까르띠에는 최초의 현대식 손목시계를 만든 브랜드이기도 하다.


앞서 말한 시계 업계의 자동화 공정 도입이나 기술 평준화, 디자인 강조 추세가 이 산업의 진입 장벽을 낮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분야의 유명 브랜드가 시계 쪽으로 진출하는 데에 꽤 유리한 상황이 만들어진 건 사실이다. 진입장벽이 낮아졌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자사 무브먼트의 개발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특히 컴플리케이션 무브먼트 제조는 난도가 매우 높다. 무브먼트 신뢰도와 미적인 효과까지 갖추려면 난도가 더 높아진다. 또 인하우스 무브먼트 제조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다. 개발 무브먼트를 안정화하고 개선하는 데 여전히 많은 시간과 자본이 필요하다. 다이얼 디자인이나 케이스 제조 정도라면 확실히 진입장벽이 낮아졌다고 할 수 있지만, 무브먼트까지 제작하려면 여전히 벽은 높다.


국내에서도 요 몇 년 사이 시계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답변을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1995년부터 수년간 잡지사 기자 생활을 했다. 시계를 다루기 시작한 건 노블레스에 적을 두면서부터였는데, 노블레스에서도 시계페어를 취재하기 시작한 건 2007년부터였다. 노블레스 같은 명품 브랜드 패션 잡지조차도 시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이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시계 수리에 관한 책 정도가 몇 권 나와있을 뿐이었다. 시계 잡지는 아예 없었고 당연히 시계를 취재하는 매체도 거의 없었다. 빈센트 앤 코와 같은 가짜 스위스 시계 사건이 일어난 게 2006년이었으니, 당시의 시계에 대한 이해도와 지식수준을 짐작해볼 수 있다.

명품을 소개하는 하이엔드 잡지사들이 시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2007년부터였다. 노블레스에서도 2008년부터 시계 관련 책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해 2009년 11월 Watch Guide 책을 출간했다. 2009년엔 독일 시계 전문 잡지 크로노스 한국판이 시공사에서 나왔다. 내가 ‘시계이야기’ 책을 낸 것도 2011년의 일이었다.

온라인에선 소수 시계 마니아들이 2006년부터 타임포럼 사이트를 만들어 활동했다. 국내 유일무이한 시계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였다. 2011년 법인으로 전환하면서 내가 대표로 합류했다. 합류 당시 4만 5,000여 명이던 회원 수는 현재 9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2013년부터는 인쇄매체물도 발간하기 시작해 현재는 연감 등을 정리한 단행본까지 내고 있다.

시계에 대한 관심 증가와 함께 시장도 크게 성장했다. 우리나라는 현재 스위스 시계 수출국 10~11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시장이 커짐에 따라 남성지나 패션지, 각종 신문 매체의 취재 경쟁이 날로 뜨거워지고 있음도 체감하고 있다. 하지만 크게 성장한 시계 시장에 비해 시계 전문 칼럼니스트나 전문 서적의 비중은 여전히 턱없이 적은 편이다.


국내 시계 제조사에 대한 평가는? 특별히 눈에 띄는 곳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
국내에도 몇몇 시계 브랜드가 있긴 하지만 무브먼트까지 온전히 제조하는 곳은 사실상 없다고 본다. 대부분 디자인만 입히는 수준인데 디자인 면에서도 솔직히 좀 약한 것 같다. 국내에서 눈에 띄는 브랜드는 로만손, 아르키메데스, 트리젠코 정도다. 로만손은 꾸준히 바젤월드에 나가고 있고 또 어느정도 자리도 잡았다. 하지만 이미 고가의 시계를 경험한 사람들을 설득하기에는 좀 부족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우림FMG에서 론칭한 아르키메데스도 주목할 만하다. 수많은 시계 브랜드를 소개한 회사답게 노하우가 있다. 하지만 유니크한 디자인을 조금 더 강화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가장 최근 론칭한 트리젠코는 세계적인 워치 메이커 루드위그 외슬린의 무브먼트를 사용할 권한이 있다고 알려져 있어 기대가 된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국내 시계 제조 산업도 규모가 상당했다.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다고 보나.
안타까운 부분이다. 현재는 수리 부문에서만 빛을 발하고 있다. 하지만 손재주가 뛰어난 만큼 제조 부문도 곧 따라올 것이다. 정보를 습득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직업적으로 뛰어들고자 하는 젊은이들도 늘고 있어 전망은 밝다고 생각한다. 스위스 시계학교의 문을 두드리는 한국인들도 매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최근에는 나에게도 어떻게 하면 워치메이커가 될 수 있느냐는 문의 메일이 오고 있다.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선 우리 매체들이 해야 할 일도 많다. 단순히 신제품만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워치메이커를 꿈꾸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도 함께 제공해야 한다. 물론 이들 정보를 전달해줄 잡지와 책 등의 매개체도 더 많아져야 한다. 이를 통해 정보를 충분히 습득한 후, 국내에서 시계 제조 경험을 쌓고 세계로 나가는 것이 시행착오를 줄이는 길이다. 실력 있는 워치메이커가 늘어나면 자연히 국내 브랜드 수준도 올라갈 것이고 국내 시계 제조 산업도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타임포럼도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정희경 타임포럼 대표는…
홍익대학교에서 예술학을 전공했다. 패션과 잡지에 관심이 많아 노블레스, 마리끌레르, 마담휘가로 등 잡지사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잡지사에서 독립한 후 2011년 국내 시계 마니아들의 바이블로 꼽히는 ‘시계이야기’를 출간했고, 같은 해 온라인 시계 커뮤니티 타임포럼에 대표로 합류했다.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국내 시계 시장을 개척한 1세대 시계 전문가로 꼽힌다. 내년엔 타임포럼 시계 아카데미를 설립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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