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아메리칸 드림과 유러피안 드림

[FORTUNE'S EXPERT] 윤창현의 글로벌 전망대

미래학자 제레미 러프킨은 '유러피안 드림'의 특징을 공동체 내의 관계, 다양성, 삶의 질, 환경보전을 염두에 둔 지속가능개발, 보편전 인권이 중시되는 가치체계로 정의했다. 하지만 유럽재정 위기와 이를 수습하는 과정을 보면 그가 말한 '유러피안 드림'에 의구심이 든다. 채권국과 채무국 사이 갈등이 자꾸만 커져가고, 해결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이처럼 판이하게 다르다.



아메리칸 드림은 청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미 대륙으로 건너가면서 시작됐다. 새로운 땅에 정착한 그들에게 미 대륙은 성경에 나오는 가나안 땅이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야훼의 뜻에 따라 모세의 인도를 받으면서 애급의 박해를 피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정착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자기들만의 나라를 건설하게 된다. 이와 비슷하게 죽음을 무릅쓰고 신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은 나라를 세우면서 스스로 꿈을 실현해 나갔다. 미국에는 유럽에서처럼 극복해야 할 '앙샹 레짐 Ancient Regime', 곧 기득권과 구체제가 없었다. 봉건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걸림돌이 되었던 기득권 세력이 없었으니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기독교 이념에 기초한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데 매우 유리한 조건이었다. 아메리칸 드림은 바로 이런 토양 하에서 탄생했다.

영화 '록키'를 봐도 미국식 사회 환경이 잘 드러난다. 뒷골목에서 해결사 역할이나 하던 무명 복서가 무적의 챔피언과 대결할 기회를 얻어 사투를 벌이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이 영화는 소위 아메리칸 드림을 잘 그린 영화로 평가받아 아카데미 상도 거머쥐었다.

몇 해 전 아메리칸 드림에 대응한 유러피안 드림을 제시한 저술가가 있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 경영대학원 교수인 제레미 러프킨은 저서 '유러피안 드림(2004)'에서 아메리칸 드림과 유러피안 드림을 정리하고 모형을 제시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아메리칸 드림은 개인의 자유, 일관성, 부의 축적, 무제한적 발전, 재산권 등이 중요시되는 가치체계다. 이에 비해 유러피안 드림은 공동체내의 관계, 다양성, 삶의 질, 환경보전을 염두에 둔 지속가능개발, 그리고 보편적 인권이 중시되는 가치체계이다. 물론 그는 이러한 가치체계가 실제로 유럽이라는 지역에서 완벽하게 구현되고 있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유럽 지역에서 실제로 이 같은 유러피안 드림의 씨앗이 뿌려지고 태동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것이 아메리칸 드림을 대체하는 새로운 가치체계가 될만한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같은 대비에는 한계가 있다. 한쪽은 건조한 이익 추구, 물질주의적 접근에 가까운 흐름을 중시한다. 반면 다른 한쪽은 따뜻하고 아름다운 인본주의적 접근을 중시한다. 러프킨처럼 아메리칸 드림과 유러피안 드림을 구분하면 어느 쪽이 나은지는 매우 자명해진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자. 미국이 공동체나 환경보전을 무시하고 있는가? 유럽 사람들은 모두 개인적 자유보다 공동체 가치를 우선시 하면서 자기를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서로 다른 민족, 다른 국가로 이뤄졌지만 유러피안 드림이라는 공통된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가.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고 유럽재정위기가 아직도 진행 중인 작금의 상황을 보면 유럽의 모습은 영 예전 같지가 않다. 유러피안 드림, 곧 유럽몽(夢)이 일장춘몽 수준으로 끝나는 건 아닌지 의심마저 든다. 무엇보다도 위기 이후 유럽국가들 간 갈등이 상당히 심해지고 있는데, 이런 현실 속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건 각국이 자국 이익추구에 급급하고 전체 유럽공동체, 나아가 이로 인해 초래되는 세계 경제 부진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유로화 출범의 최대 수혜자로 꼽히는 독일을 예로 들어보자. 독일은 통일 이후 경상수지적자를 기록하면서 통일 후유증에 시달렸지만, 유로화가 출범하면서 같은 돈을 사용하는 역내 국가 간 무역이 증가했고 이에 따라 싸고 질 좋은 독일제품에 대한 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수 대에 걸쳐 기술을 갈고 닦아 온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히든챔피언으로 등극하면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고, 경상수지 흑자가 GDP의 3% 근처까지 증가하면서 엄청난 자산을 쌓게 되었다.

물론 하르쯔 개혁(2003년 독일 슈뢰더 정부가 고용시장 개선을 위해 4단계로 나눠 추진한 개혁) 등을 통해 뼈를 깎는 구조조정과 노력을 한 것도 국가 경제에 상당히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유로화라는 공통통화 도입이 독일의 부상에 상당한 역할을 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유럽의 병자'라는 놀림을 받았던 나라가 이젠 '유럽의 슈퍼스타'라는 칭찬을 받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는 어떤가. 공통통화 도입 이후 경상수지 적자가 급증하는데도 동일한 화폐로 결제가 이뤄져 큰 문제 없이 버틸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리스는 경상수지 적자 위험에 대해 둔감해졌다. 경상수지 적자로 인해 해외로 유로가 빠져나가는 상황에서도 정부가 국가부채를 통해 유로화 자금을 조달하면서 부채가 더 늘어났다. 결국은 이 부분이 문제가 되어 작금의 위기가 발생한 것이다.

독일의 흑자 기조와 남유럽 국가의 적자 기조가 위기를 초래한 원인이라면 이를 풀어나가는 과정도 좀 더 협조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민주주의적으로 구성된 유럽 각국의 정부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국민의 뜻을 반영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부채국은 자국의 부채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대외로 부담을 전가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반면 흑자국들은 일방적인 지원을 해줄 수 없다면서 위기국에 상당한 긴축과 구조조정을 요구하고 있다.

갈등은 자꾸만 커지고 있고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 결과 타 지역 나라들도 힘들어지면서 세계 경제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을 보면서 유러피안 드림이 지적하는 대로 유럽이 배려와 공동체적 가치를 우선시하고 있느냐에 대한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유러피안 드림이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가치들이 얼마나 실현되기 어려운 것인지 느끼게 되는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한 미국은 빠르게 회복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유럽 재정위기 수습은 아직도 멀어 보인다. 미국 경제는 저부담·저복지, 유럽국가들은 고부담·고복지라는 특징을 띠고 있다. 예컨대 스웨덴은 일부 품목을 제외하곤 부가가치세가 25%이다. 보편적 복지를 위해 국민 개개인이 엄청난 부담을 지면서 세금을 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러피안 드림이 추구하는 가치를 실행하기 위해 모두가 엄청난 부가세를 감당하면서 모든 물건이 비싸지는 상황을 견뎌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우리 모두가 이에 동의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겠다던 공산주의는 지구 상에서 맥을 못 춘 지 이미 오래다. 지금은 고귀한 가치를 실제로 구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해하면서 보다 현실적 대안을 찾아 지속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윤창현 교수는…
▲1960년 충북 청주▲1979년 대전고 ▲1984년 서울대 물리학과 ▲1986년 서울대 경제학과 ▲1993년 미 시카고대 경제학박사 ▲1993~1994년 금융연구원 연구위원 ▲1995~2005년 명지대 경영무역학부 교수 ▲2005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 ▲2012년~2015 한국금융연구원장 ▲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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