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를 포함해 선진경제가 공통으로 당면한 문제인 인구의 고령화, 고용 없는 성장, 그리고 심화하는 노동시장의 격차 문제를 해소하는 길은 경제성장의 제1 목표를 더 많고 더 좋은 일자리 창출에 두고 고용·복지·성장의 선순환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라는 점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나 유럽연합(EU)의 한결같은 정책 권고다. 이러한 맥락에서 박근혜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제1의 국정과제를 고용률 70% 달성으로 잡았고 노사정은 이러한 국가적 과제의 중요성에 공감해 한 달여 동안 집중 협의를 거쳐 2013년 5월30일, 전문과 60개항의 본문으로 구성된 일자리협약을 체결했다.
한국 노사관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신뢰의 부재다. 과거의 약속이나 합의를 반복적으로 무시하거나 잊어버릴 경우 협상의 당사자 간에 신뢰가 쌓일 리가 만무하고 관계는 제자리걸음이나 퇴행을 하게 될 것이다. 현재의 노동시장개혁, 노사정 협상이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도 과거의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리거나 무시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년연장을 위한 임금피크제, 통상임금 문제와도 연관되는 임금구조 단순화 등은 임금체계 개편이라는 더 큰 그림의 주요 구성항목이다. 선진국에 비해 너무 짧은 정년 60세, 그리고 이후에는 국민연금 수급연령과 연계해 65세까지 연장할 경우 그 혜택은 현 고령층보다는 오히려 청년층 등 다음 세대에 더 많이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연공급적 임금체계를 직무·성과급 중심으로 개편하고 생산성과는 무관한 근속에 따른 임금상승률을 보다 긴 근로생애를 기준으로 하향 조정해야 할 것이다. 임금피크제를 넘어 임금체계 개편이라는 보다 구조적인 목표를 지향해야 개혁의 효과가 지속가능할 것이다.
청년 일자리 문제해소가 노동시장 개혁의 중요한 부가가치로 제시되고 있다. 위에 언급한 5·30 노사정 일자리협약에 따르면 "경영계는 매년 신규 채용계획 수립시 기업여건에 따라 청년층 채용을 전년에 비해 증가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며(2013-2017)…정부는 2014-2016년간 매년 공공기관 정원의 3% 이상을 청년으로 신규채용하며…단계적으로 확대한다"(협약 제2장(1)가,나)고 돼 있다. 당시 일자리협약 체결의 당사자 중 하나였던 필자는 국가사회에 대한 위의 약속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믿고 싶다. 몇몇 대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신규채용을 늘리겠다고 선언하고는 있지만 아직 경영계 차원에서 노동시장개혁의 가치에 호응해 위의 협약을 성실하게 이행하겠다는 선언은 들어보지 못했다. 세계 최장의 근로시간과 복잡하고 불합리한 임금체계를 개혁해야 저성장의 터널에 갇혀 있는 우리 경제의 일자리 창출 여력이 생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일자리협약에서 노사정은 지킬 수 없거나 지키지 않을 것들을 약속하지 않았다. 만약에 그렇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당사자들 스스로 자기부정이 될 것이다. 우리 노동시장의 개혁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제, 그리고 신뢰하고 협력하면 반드시 성취될 수 있는 과제들을 중심으로 협의와 합의가 이뤄졌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노사정이 다시 대화를 재개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다시 머리를 맞대면 얼마 지나지 않은 과거에 했던 약속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이번에는 꼭 일자리 창출과 노동시장개혁에 대한 보다 진전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기를 기대해본다. 그러나 사회적 협상에서 잊지 말아야 할 금도가 있다면 그것은 곧 과유불급과 점진성의 원칙이다. 과유불급의 원칙은 협상의 끝이 상대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라는 것을, 점진성의 원칙은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면 상대에게 자신이 있는 곳까지 한 번에 점프해오라고 재촉하지 말라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방하남 한국노동연구원장·전 고용노동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