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미 2%·중 8% 성장 가능해 세계경제 'R의 공포' 비켜갈 듯
한국 수출 둔화 불가피하지만 재정·금융시장 체력 좋아져 급격한 성장률 하락은 없을 것
요즘 정부기관은 물론 한국은행ㆍ민간연구소ㆍ금융회사들까지 가장 주시하는 곳이 있다. 바로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 위치한 국제금융센터다. 이곳에서는 시시각각 전해져오는 글로벌 상황을 토대로 분석자료를 만들고 보고서를 작성해 정부와 민간기업의 전략 마련을 위한 소중한 자료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24시간 실시간으로 전해져오는 글로벌 금융시장 동향에서 현상을 분석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플랜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이성한(사진) 국제금융센터 원장은 유럽 재정위기와 글로벌 금융시장의 변화 속에서 워치독(watch dog) 역할을 하고 있는 장본인이다. 이 원장은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위기가 그리스ㆍ스페인에 그치지 않고 범위를 확대할 가능성이 크다"며 "스페인에 대한 유럽연합(EU) 차원의 구제금융 조치에도 불구하고 유로존 사태에 대한 추가 방안이 미흡할 경우 다른 국가로 전염되는 현상이 벌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EU 차원에서 유럽 재정위기의 전염성과 파급 효과를 차단하려는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지만 글로벌 금융시장은 뚜렷한 진전 없이 '그렇고 그런 상황(muddling through)'이 상당 기간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원장은 그리스 재선거와 관련해 "그리스의 경우 친(親)긴축, 반(反)긴축 정당 중 어느 정당이 정권을 잡더라도 협상을 통해 유로존 잔류를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면서 "하지만 협상 과정에서 불거지는 마찰과 불협화음으로 오는 7~9월 중 불안감이 증폭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유럽 사태로 수출 등 한국의 실물경제가 타격을 받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선진국에 비해 신흥국은 상대적으로 양호한 활력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면서 "우리나라로서는 아시아 역내 교역 증가, 중국 내수 확대 등 변화 요인들을 활용해 새로운 기회를 창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글로벌 경제의 운명을 좌우할 그리스 총선을 하루 앞둔 지난 16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 있는 국제금융센터에서 이 원장을 만나 유럽 사태의 향방과 이에 파생되는 결과, 그리고 한국 금융ㆍ실물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들어봤다.
그리스 연정 실패하면 불안감 증폭될 것
우선 유럽 사태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물었다. 스페인이 구제금융을 신청하면서 유럽 채무위기가 도미노식으로 다른 나라로 옮겨 붙을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키프로스가 다음 희생양이 될 것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이 원장은 "스페인의 구제금융 신청 이후 금융시장이 다소 진정되는 조짐이 있지만 아직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라면서 "그리스 재선거 이후 연정에 실패하면 불안감은 또다시 불거질 것이고 글로벌 금융시장이 다시 출렁거릴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재정위기에 더해 정치 혼란으로 EU의 골칫거리로 전락한 그리스의 경우 재선거 이후 어느 정당이 집권하더라도 문제 해결에는 미숙함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는 설명이다.
"스페인과 이탈리아가 유럽 사태의 갈림길을 결정하는 분수령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난해 말 스페인과 이탈리아가 발행한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이 폭등한 적이 있어요. 이탈리아 국채 수익률이 7%를 넘은 경우도 있습니다. 이탈리아까지 구제금융 대열에 합류할 경우 그 파장은 만만치 않을 것으로 봅니다." 이 원장은 스페인과 이탈리아에 특히 주목했다.
실제 유로존에서 그리스 경제 비중은 2%에 불과하지만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각각 11%, 16%에 달한다. 이 원장은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우려가 현실로 나타날 경우 유로존 성장률이 -4~-5%로 주저앉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그리스보다 경제 규모가 큰 스페인과 이탈리아가 야기할 파장은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라고 지적했다.
그렉시트ㆍ스펙시트는 가능성 크지 않아
과연 그리스와 스페인이 유로존에서 탈퇴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 원장은 가능성을 낮게 봤다. 그는 "그리스의 경우 친(親)긴축 혹은 반(反)긴축 정당 가운데 어느 쪽이 정권을 잡더라도 협상을 통해 유로존 잔류를 택할 공산이 더 크다"면서 "다만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마찰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이며 7~9월에 불안감이 증폭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분석했다.
이 원장은 유럽 사태 진화를 위해서는 EU 핵심 멤버인 독일과 프랑스의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의 유럽안정화기구(ESM)는 국가에 대해서만 지원할 수 있습니다. 은행 등 특정 분야에 대한 지원은 만장일치하에서만 가능한데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이 때문에 프랑스는 ESM 의사 결정의 유연성을 확대하고 뱅킹 유니언(금융동맹)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프랑스가 주장하고 있는 ESM 개혁 방안을 예의 주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구체적으로는 은행 공동 감독 등이 준비과제로 논의되고 있는데 이런 것들에 대한 합의가 신속히 도출돼야 한다"면서 "이렇게 되면 스페인에 대한 EU의 지원이 충분치 않다는 우려를 불식시킬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로서는 실사 결과가 나오지 않아 정확히 얼마가 필요한지 알 수 없지만 주요 투자은행(IB)들 사이에서는 스페인 구제금융 규모가 부족하다는 시각이 있다고 그는 전했다.
세계 경제 'R의 공포' 없을 듯
그리스와 스페인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지 않을 경우 세계 경제에 드리운 'R(리세션)의 공포'가 현실화되지는 않을 것으로 이 원장은 전망했다. 세계 경제가 적어도 마이너스 성장으로 주저앉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는 "유로존은 마이너스 성장 가능성이 있고 올해 성장률이 -0.3% 정도로 추정되기도 한다"면서 "하지만 세계 최대 경제국인 미국은 2% 내외의 성장은 달성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라고 말했다.
"5월 미국의 고용지표를 보면 비농업 부문 고용이 10만명가량 줄었지만 주택경기가 바닥을 쳤다는 분석이 많고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도 상당히 떨어져 소비 여력이 있어요. 미국은 소비가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70%가 넘는 내수 의존 국가이기 때문에 유로존 경기침체에 따른 영향이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우리나라 최대 수출 국가인 중국도 8% 성장은 가능할 것으로 봅니다." 그는 EU와 함께 글로벌 경제를 움직이는 '3각축'인 미국과 중국의 경제에 대해서는 다소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유로존 사태로 글로벌 경제가 리세션 국면으로 빠져들 가능성은 극히 낮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한국 금융시장, 충격 견딜 만큼 탄탄
이 원장은 우리나라 금융시장의 체력도 과거에 비해 한층 강해졌다고 진단했다. 지난해 자본유출입 변동성 완화를 위해 도입한 3종 세트(선물환포지션 규제, 채권 과세 외국인 특례 폐지, 은행세 도입)가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판단이다. 그는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2010년에는 원ㆍ달러 환율 변동성이 아시아 신흥국에 비해 2배 이상 높았지만 최근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또 "주식시장에서는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갔지만 채권시장에서는 오히려 유입되고 있고 두 시장을 합해서 보면 유출보다 유입이 많다"며 "3종 세트가 자본유출입 완화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금융 당국의 외화유동성 확보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최근 수출입은행ㆍ산업은행이 사무라이채권 발행에 성공하는 등 외화 조달선이 다변화되고 있고 시중은행들도 중장기 차입 비중을 크게 늘렸다"며 "은행들이 조달한 외화를 운용하기가 힘들다는 불만을 토로할 정도로 외화유동성이 풍부해졌는데 덕분에 최근 금융시장 불안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외화채권 가산금리에 큰 변화가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 당시에 비해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이 크게 늘었고 단기외채 비율도 많이 줄어 유럽 시장이 진정되면 원ㆍ달러 환율도 올 초 예상한 대로 하락(원화 강세) 쪽으로 방향을 잡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 순(純)수출에는 영향 없어
그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 국가 채무위기가 본질적으로 달라 그 충격도 상이할 것으로 예상했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는 예상치 못한 충격이었기 때문에 파장도 컸지만 최근 유럽 국가 채무위기는 이미 시장이 충분히 예상하고 있는 이슈예요. 때문에 그 자체의 충격은 크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국가 채무위기는 해결이 어렵습니다. 국가의 재정 상태를 근본적으로 뒤바꿔야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에요. 시장이 인지하고 있는 위기이지만 해결이 안 되면서 오래 지속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경제도 수출 둔화가 불가피하지만 성장률이 급격히 둔화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유럽과 중국 경기 둔화로 우리 기업의 수출이 줄겠지만 수입도 감소하면서 성장률을 결정하는 순수출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게 이 원장의 설명이다. 그는 "올해 우리 경제 성장률은 3%대 초반을 유지하면서 2009년과 같은 급격한 성장률 하락 사태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선진국들이 그동안 쌓아온 부채를 줄이고 재정을 건전화하는 과정에서 향후 수년간 저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수출에 의존하는 우리 경제도 성장세 둔화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그는 "선진국에 비해 신흥국들은 양호한 재정 상황, 높은 성장잠재력 등 상대적으로 활력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면서 "우리 경제는 수출 다변화, 신흥시장 개척 등을 통해 선진국 수요 위축을 보완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럽 위기 와중에서도 우리 경제가 3%대의 성장은 무난하게 달성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한국은행이 당장 금리를 손대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이 원장의 판단이다. "기준금리는 방향성이 중요해요. 한번 내리거나 올리고 마는 게 아닙니다. 금리에 한번 손을 대면 최소한 두번 이상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기나 물가에 확실한 신호가 와야 하는데 3%대 성장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는 금리를 움직이기가 쉽지 않아요."
하지만 이 원장은 정부와 한은이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액션 플랜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두 차례에 걸친 유럽중앙은행의 장기대출프로그램(LTRO)이 위기를 진정시킬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지만 현실은 달랐다"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컨틴전시 플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국제금융센터는 국제금융센터는 글로벌 금융시장의 '파수꾼'이다. 정부 관료와 싱크탱크 연구원들은 유럽 재정위기 와중에 고군분투하고 있는 국제금융센터를 일컬어 '글로벌 리스크 워치 타워(Global Risk Watch Tower)'로 인식하고 있다. 센터는 지난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경제 조기경보시스템'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설립됐다. 가장 큰 역할은 명칭 그대로 국제금융시장 모니터링. 때문에 센터 사무실의 불은 1년 365일 꺼지는 법이 없다. 국내 시장이 단잠에 빠진 새벽에도 40여명의 직원들이 돌아가며 미국ㆍ유럽ㆍ남미 등 해외시장의 각종 이벤트와 주식ㆍ채권 등 금융시장의 동향을 주시한다. 전장(戰場)에서 상황을 오판하면 아군의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것처럼 국제금융센터가 상황 분석을 잘못하면 국부가 유출될 수 있다는 긴장감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지난해에는 외국인투자가들의 국내 시장 교란을 예방하기 위해 '자본유출입 모니터링실'을 신설하기도 했다. 직원들도 센터의 역할에 맞게 현장을 잘 아는 시장 전문가를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여느 연구소와 달리 박사 학위 소지자보다는 전직 외환딜러, 펀드매니저, 투자은행(IB) 업무 경력자 등이 대거 포진해 있다. 화려한 스펙보다는 실무 경험이 금융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게 이성한 원장의 판단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센터 직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위기를 촉발한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 이후 국제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체크해야 할 항목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위기 직후인 2009년 초에는 밤샘근무를 하던 센터 직원 한명이 과로로 쓰러지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고객도 다양하다. 국회ㆍ청와대ㆍ기획재정부ㆍ한국은행ㆍ금융감독원 등 정부기관뿐 아니라 금융지주ㆍ시중은행ㆍ증권사ㆍ보험사ㆍ민간연구소ㆍ대기업 등 70여곳에 달한다. 가장 인기 있는 보고서는 매일 오전7시 e메일로 배포되는 '국제금융속보'. 새벽 동안 국제금융시장의 동향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보고서로 파수꾼들의 열정과 땀방울이 스며든 작품인 셈이다. 외환딜러나 펀드매니저 등 시장 참가자라면 반드시 정독해야 하는 필수 보고서로 자리매김했다. 일반인들도 e메일 신청을 하면 무료로 받아볼 수 있다. 금융시장의 이슈를 신속하게 알려주는 문자 서비스도 인기다. 정부의 국제금융 업무 자문과 대외활동을 지원하는 것도 센터의 주요 역할이다. ▦외평채 발행시 적정성 검토, 주간사 선정, 발행시장 정보 제공, 적정 가격 자문 ▦해외 투자가 및 신용평가사들과의 접촉 ▦정부의 해외 기업설명회(IR) 활동 지원 ▦ASEAN+3 실무그룹 활동 지원 ▦아시아개발은행(ADB)의 역내 조기경보호형 구축 프로젝트 수행 등 다양하다. 센터는 앞으로 국제 금융시장에 대한 '큰 그림'을 제시할 수 있는 심층분석 능력을 강화해 정부와 금융기관들이 시장 변화에 선제적 대응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약력 ▦1957년 강원도 양구 ▦1976년 서울 성동고 ▦1981년 연세대 경영학과 ▦1992년 미국 일리노이대학원 경제학 ▦2001년 재정경제부 경제협력국 국제경제과장 ▦2004년 재정경제부 경제협력국 경협총괄과장 ▦2006년 국민경제자문회의 사무처 총괄기획국장 ▦2008년 재정경제부 개발전략심의관 ▦2008년 기획재정부 대외경제국장 ▦2009년 기획재정부 FTA국내대책본부장 ▦2010년 국제금융센터 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