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새로운 도전:2(최명재의 인생도전:끝)

◎문교부 ‘교명 「민족사관고」 안된다’ 불허/교육계 반대 무릅쓰고 마침내 학교 설립최명재 회장의 삶의 목표는 정해졌다. 교육을 통하여 민족적이며 세계적인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교육자로 출발하지 않고 「상인」으로 출발했던 그로서는 교육에 대해서도 「상인적」인 접근방법이 필요했다. 즉 돈을 벌어 투자하는 것이었다. 87년 파스퇴르유업을 설립하여 국내 처음으로 저온살균우유를 시판하기 시작, 수많은 장애와 송사에 시달리면서도 이듬해인 88년에는 이미 이 회사의 우유는 소비자들로부터 「기다리던 것이 왔다」는 호응을 얻었다. 기업이 안정적인 성장의 궤도에 올라서자 그는 즉시 「학교」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많은 책을 보고 수많은 전문가들을 만났다. 외국으로 나가 견문을 넓혔다. 그의 생각은 어느덧 「수월성 속진교육」, 즉 소수정예의 천재교육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90년부터 최 회장은 구체적으로 학교 설립을 위한 행보를 시작했다. 문교부차관을 지낸 교육전문가를 초빙하여 사업추진의 실무진으로 삼고 국내 교육계의 원료와 중진들을 초빙하여 자문단을 구성, 그들의 추진력과 지혜를 결집하였다. 그러나 실무진이거나 자문위원이거나 교육 전문가들의 의견은 최 회장이 당초 마음먹었던 교육의 형태와 목적을 조금도 변경시키지 못하였다. 『당신이 생각하는 교육은 민주사회에 맞지도 않고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유형이다』는 이유로 많은 교육학자들이 그의 행동을 만류하고 생각을 비판했다. 그러나 최 회장은 『역사는 이론가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는 한마디로 일축하고 자신의 구상대로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교육계의 반대와 부정적인 생각의 울타리는 저온살균우유에 대한 기존 유업계의 훼방 및 소비자의 고정관념이라는 철벽보다 더 두텁고 끈질겼다. 최 회장은 이번에도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 고집으로 이 장벽을 밀고 나갔다. 문교부도 이 학교의 설립 인가를 놓고 골치를 앓고 있었다. 6공후반의 문교장관 P씨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최 회장의 고집을 꺾어보려 했다. 『민족사관고등학교라는 이름만 고치면 설립을 허가하겠소. 고등학교의 이름에 관념적인 명칭이 들어가는 예가 없어요.』 『고등학교의 명칭에 왜 관념적인 것이 없어요. 「진명」이나 「경복」이니 「휘문」등 모두가 관념어 아닙니까.』 『그건 예날 이야기지 요즘 설립되는 학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요즘 설립하는 학교들의 교육목적이 분명치 않아서 그래요.』 『이 양반 이거 못말릴 사람이네.』 결국 그는 학생 30명에 선생 30명의 꿈같은 학교를 만들어 개교했다. 세계에 이런 학교는 없다. 그를 비난하던 교육계는 지금 「수월성 교육」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차츰 이같은 교육을 확산하는 방향으로 움직여가고 있는 중이다. 이런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최 회장은 또 새로운 목표, 즉 민족사관대학의 설립을 위해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이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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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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