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 삶을 바꾸는 적정기술

이부섭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2009년 미국 캘리포니아 롱비치에서 열린 지식강연 테드(TED) 행사장에 빌 게이츠 전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 강연자로 나섰다. 그는 정보통신기술(ICT)에 대한 박학한 지식이나 미래전망 대신 아프리카인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말라리아에 대해 얘기했다. 그러다 갑자기 동그란 유리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모기들이 튀어나왔다. 말라리아 모기의 치명적인 위험에 대해 듣고 있던 관객들은 경악했고 행사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외신들은 "가장 효과적인 쇼이자 말라리아 퇴치 운동의 획기적인 전환점"이라고 평가했다.

그의 메시지는 간단했다. '우리의 두려움이 아프리카인의 두려움인 만큼 말라리아 퇴치에 함께 나서자'는 것이다. 게이츠는 부인과 함께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세웠다. 재단은 무턱대고 돈을 나눠주지 않는다. 말라리아 백신 연구에 1억7,000만달러, 소아마비 퇴치에 3억5,500만달러, 결핵 퇴치에 3,300만달러 등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이지만 대부분 과학에 기반한 해법 개발과 보급에 쓰인다.


게이츠 재단의 '모조 똥(배설물)' 구입 사건도 과학적 해법의 중요한 사례 중 하나다. 재단은 2011년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화장실 재발명 프로젝트'를 공개했다. 전세계 26억명 이상의 사람들이 화장실이 없어 배설물을 구덩이나 땅 위에 그대로 버리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환경오염과 위생 문제를 해결하자는 목표로 시작됐다. 특히 아프리카는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할 여건도 안 되는 만큼 아예 화장실의 개념까지 바꾸겠다는 일종의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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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뒤 시연장에서는 실제 배설물을 사용할 수 없어 모조 똥이 등장했다. 당시 태양광을 이용하거나 폐수를 재활용하는 형태의 신개념 화장실이 소개됐고 현재 상용화를 위한 단계에 접어들었다. 막대한 돈을 들여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하는 것보다 현지 실정에 맞는 전혀 새로운 화장실을 만들어 지속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게이츠가 돈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이처럼 해당 지역에서 지속적인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도록 개발된 과학기술을 '적정기술'이라고 부른다. 메사추세츠공대(MIT) 미디어랩이 만들어낸 100달러 노트북도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어린이 한 명당 한 대의 노트북'이라는 구호로 시작해 2006년부터 나이지리아·리비아·우루과이·페루·가나 등 세계 곳곳의 아이들에게 노트북을 나눠줬다. 적정기술은 고기를 주는 대신 고기잡는 법을 가르쳐 평생 먹고살 수 있게 해주는 방식이다. 또 가진 자나 선진국의 과학이 아닌 모두를 위한 과학이기도 하다.

최근 우리나라도 적정기술에 대한 활발한 연구와 해외지원 사례가 늘고 있다. 국경 없는 과학기술자회는 캄보디아 국립기술대학에 '한-캄보디아 적정과학기술센터'를 세워 저비용 수처리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안성훈 서울대 교수팀은 단전·단수가 빈번한 네팔 고산지대에 태양광과 소규모 수력발전 시스템을 설치해줬다. 한광현 충북대 교수팀은 친환경 토양관리 기술을 동남아에 무상으로 제공했다.

삶을 바꿔준 과학자들에 대한 고마움은 곧 한국의 국가이미지 제고로 이어진다. 부자인 게이츠만이 세계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기술의 힘은 생각보다 훨씬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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