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경제는 그동안의 경제운영 및 기업경영방식, 소비행태에 있어 일대 혼란과 전환기를 맞고 있다. 외환위기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정부는 기업에 대한 보호와 지원에 치중하였다. 모든 경제제도와 정책이 생산자 위주로 추진되어 왔다. 이러한 공급자 위주의 경제정책은 기업의 창의력과 시장에서의 자생적인 적응능력을 쇠퇴시켜 궁극적으로 기업경쟁력 약화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제 WTO(세계무역기구)체제의 출범으로 세계가 국경없는 하나의 시장으로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하나의 열린 시장에서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도 국경을 초월하여 치열한 경쟁을 치러야 하는 무한경쟁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환경변화에 어느 경제주체도 대비해 오지 못하였다는데 있다. 특히 무한경쟁시대의 심판자격인 소비자의 비합리성과 무책임성은 우리경제의 앞날을 암울하게 한다.
이제 겨우 1인당 GNP(국민총생산)가 1만달러를 달성한 시기의 소비양태를 살펴보자. 매년 20%씩 증가하는 외식비, 1만달러시대의 일본보다 3∼4배에 이르는 소비재 수입, 중하위 소득계층에 만연된 편승소비, 외국인의 국내관광보다 높은 우리의 해외여행 경비. 이같은 현상은 그동안 못먹고 못본 것에 대한 욕구가 일시적으로 분출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연간 7조원씩 버려지는 음식물쓰레기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연간 2억달러씩 수입하는 양주와 3조원에 가까운 수입의류, 청소년의 무분별한 외제선호와 모방소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용카드 연체액(6개월이상)은 9천억원을 넘고 있다. 돈이 없으면 빌려서라도 먼저 소비부터 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의 소비행태는 1인당 3만달러가 넘는 선진국보다 심한 상태에 있다.
이제 기업과 정부가 소비자의 선택을 강요하던 시대에서 소비자가 기업의 우열을 판정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소위 소비자주권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잘못된 소비습관들이 우리경제에 남아 있는 한 소비자주권은 실현될 수 없으며 선진국으로의 진입도 요원할 것이다.
소비자들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선택능력이 기업의 체질을 강화시키고 국민경제를 튼튼히 하는 초석인 것이다. 대다수 소비자가 값싸고 실용적인 상품을 찾는다면 어떤 기업이 조악한 상품을 생산 판매할 수 있겠는가. 소비자의 사치심에 자극을 주는 허위 과장광고에 현혹되지 않는다면 어떤 기업이 비싼 돈을 들여 요란한 광고를 하겠는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소비가 건실한 기업을 만드는 것이다.
기업으로 하여금 기술혁신과 품질을 개선하도록 보이지 않는 압력을 가할 책임은 우리 소비자에게 있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소비자가 우리사회에 튼튼히 자리잡아야 한다. 그래야만 기업의 경쟁력도 향상되고 지금의 위기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기업이 대전환기적 위기를 극복할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경쟁력 향상에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과거와 같은 과다차입을 통한 사업확장과 경쟁제한적 기업경영방식을 탈피해야 한다. 시장변화를 민감하게 파악하고 이에 부응하는 생산기술을 실현하기 위하여 기업조직을 시장지향적으로 개편하고 경영방식도 소비자지향적으로 쇄신해야 할 것이다.
국경없는 무한경쟁시대에서 소비자와 밀착되지 않는 기업의 경영방식은 기업의 존립자체를 위협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상황은 우리의 미래가 걸려 있는 「위기」일 수 있다. 기업활동의 위축과 실업증가 등 많은 사회문제의 발생이 예견된다. 그러나 위기는 위기를 치러야 하는 비용과 함께 새로운 기회도 제공한다.
우리사회 전반의 구석구석까지 만연된 비효율성과 비합리성에 대해 뼈저리게 반성하는 계기가 될 것이며 폐업하거나 전업하는 기업이 나타날 수 있다. 기업도 생존을 위한 몸부림으로 능률을 높일 것이다. 이를 기회로 신기술이나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는 신규산업이 출현할 것이다.
결국 고비용·저효율 구조로 여러 부문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시장경제원리를 근간으로 하는 공정한 규칙을 제정·관리하고 소비자 중심적인 경제구조를 구축해야 한다. 이러한 바탕위에서 기업도 땀흘린 만큼 보상받을 수 있도록 경쟁을 통해 창의와 혁신이 창출되도록 해야 한다.
여기에 시장가격의 감각을 재고하고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한 불요불급한 소비억제, 각종 구매정보를 통해 상대적 비용을 절약하는 구매관습 정착, 획득·구매한 재화에 대해 이용가치 창출과 효용가치 극대화 등 소비자의 검소하고 합리적 소비의식과 실천이 뒷받침된다면 그 효과는 극대화될 것이다.
우리 경제는 많은 시련과 도전을 극복하면서 발전해 왔다. 오늘의 위기는 오히려 우리경제의 전열을 재정비하고 구조개혁을 할 수 있는 호기로 삼아야 한다.
소비자들의 검소함과 합리성이 버티고 있는한 지금의 위기는 고통스럽지만 우리 경제에서 체질개선과 구조개혁이라는 과실을 선사할 것으로 믿는다.<소비자보호원 상임이사>
□약력
▲1944년 경남 김해 출생 ▲70년 고려대 법학과 ▲72년 행정고시 11회 합격 ▲82년 조달청 총무과장 ▲86년 미남가주대행정대학원 연수 ▲87년 한국소비자보호원 부장 ▲93년 소보원 상임이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