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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시장을 발전시키는 원동력 중 핵심은 경쟁이다. 업체끼리 서로 더 나은 성과를 내놓기 위해 경쟁하는 과정에서 질 좋은 상품·서비스가 소비자에게 제공된다. 이러한 선순환구조와는 달리 국내 투자은행(IB) 업계에서는 시장의 존립을 위협하는 방향으로 경쟁이 이뤄지는 실정이다. 외국계와의 경쟁에서 밀린 국내 IB들이 단기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성과를 내기 위해 업무능력 향상 등 조직의 질적 성장은 외면한 채 오로지 가격경쟁력으로만 승부를 걸고 있기 때문이다. 공생을 위한 선의의 경쟁은 사라진 채 진흙탕 싸움만 벌어지는 모양새다.
도이체방크에 따르면 한국의 기업공개(IPO) 시장에서 올해 12월 현재 공모액 대비 평균 수수료율은 1.5%(인센티브 포함)로 아시아 주요 국가 중 최저 수준이다. 싱가포르·호주·홍콩은 평균 수수료율이 3%에 이른다. 아시아권을 벗어나면 격차가 더욱 벌어진다. 영국에서는 4%대의 수수료율이 유지되고 있으며 미국은 6%에 달한다.
인수합병(M&A) 분야의 경우 전체 규모에 따라 수수료율이 달라진다는 점을 감안해도 매각금액 대비 1% 안팎인 현재 수준은 너무 낮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서울경제신문이 국내 및 외국계 증권사 IB와 4대 회계법인, 금융당국 등 IB 업계 핵심관계자 3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절반이 넘는 52%(16명)가 M&A 자문 때 지급되는 총 매각대금 대비 수수료가 현행보다 상향될 필요가 있다고 답했다. 13%(4명)는 현행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고 응답했으며 현행보다 낮은 수수료율을 매겨야 한다고 답한 관계자는 3%(1명)에 불과했다. 32%(10명)는 관련 질문에 대한 의견 표명을 거부했다.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수수료율 인상의 필요성을 느낀 것은 국내 IB 업계의 잘못된 경쟁 관행을 의식한 데 따른 결과로 보인다. 현재 대다수의 국내 IB들은 외형 성장에만 집중한 나머지 손해를 보더라도 수수료를 최대한 낮게 제시함으로써 사업을 따내는 식의 관행을 답습하고 있다.
지난 9월 부실채권(NPL) 시장 1위 업체인 유암코(연합자산관리)의 지분매각 주관사 선정 과정에서 벌어진 수수료 후려치기 사례가 대표적이다. 당시 입찰에 참여한 한 국내 대형 증권사는 0.5% 미만의 수수료율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거래수행능력 부분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미국계 IB JP모건에 밀렸다. JP모건을 비롯해 당시 선정작업에 참여한 4개의 외국계 IB는 모두 1% 이상의 수수료율을 써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업을 수임하기 위해 외국계 IB보다 수수료를 절반 이상 낮은 가격으로 제시했지만 결국 퇴짜를 맞은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사업을 따내는 데 성공해도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외국계 IB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익률로는 미래를 위한 재투자에 힘을 쏟을 수 없기 때문이다.
IB 업계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외국계 IB들은 사업을 따내기 위해 자신들의 업무능력을 증명할 프레젠테이션(PT)에 공을 들이는 반면 국내 IB들은 이익 마지노선에 해당하는 수수료율을 산출하느라 머리를 싸매는 게 업계의 현실"이라며 "속된 말로 남는 장사를 못하면서 서비스의 질적 개선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비판했다. 무조건 수수료부터 깎고 보는 잘못된 관행을 개선해 이익을 극대화한 뒤 재투자를 통해 업무수행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힘쓰는 선순환구조를 만들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한 대형 증권사의 IB부문 대표도 "M&A 자문업무는 정보 보안 유지 및 이슈에 대한 빠른 대응능력을 필요로 하고 거래기업의 최상위 의사결정자를 대상으로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 보다 적정한 보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문화를 바꿔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업계의 잘못된 관행을 바꾸기 위해서는 시장 플레이어인 IB가 변화하는 수밖에 없다. 특히 상대적으로 시장에 대한 영향력이 높은 국내 대형 증권사의 IB가 양질의 업무 수행이 가능한 적정 수수료의 기준을 제시하면서 후발주자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박용린 자본시장연구원 금융산업실 실장은 "IB 관련 업무 수수료가 낮아지는 현상은 국제적인 추세지만 국내 업계는 그 정도가 심한 편"이라며 "거래기업에 대해 공을 들이는 것 없이 오로지 수수료만 깎으면서 서로 상처만 남기는 식의 영업활동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IB 간 '컨소시엄(consortium·공통의 목적을 위해 조직된 조합)' 구성 활성화도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기 위한 해결책으로 제시되고 있다. '국내 IB와 국내 IB' 또는 '해외 IB와 국내 IB' 같은 식으로 연합전선을 구축해 상호 보완적 체제로 경쟁에 나선다면 고객사에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과당경쟁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IPO 시장에서는 경쟁이 과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인수물량을 복수의 증권사가 나눠 맡을 때도 있지만 M&A 자문 시장에서는 업무 효율성 저하 등의 이유로 IB끼리 손을 잡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국내 한 증권사 IB담당 임원은 "일반적으로 컨소시엄 구성은 M&A를 진행할 때 거래 성공을 위해 인수자 측에서 주로 활용하는 전략이지만 외국계와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는 국내 IB가 서로 손을 잡는 식의 협력 체계 구축을 통해 돌파구를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