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Culture & Life] 이현세 화백

미래 밝은 웹툰, 만화가 지망생에 축복 될 겁니다



미국·일본·유럽등해외 관심 커져 차별화된 시장 만들수 있는 기회
이젠 40~60대 스마트폰 독자 많아 차기작 내년 7월 포털 연재 계획
종이책 때보다 시장 양극화 심화 정부는 만화채널로 저변 넓히고 포털 신인 발굴·육성 적극 나서야


독일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서 전날 돌아왔으니 아직 시차적응을 못한 탓일까. 지난 15일 서울 포이동 화실에서 만난 만화가 이현세(59ㆍ사진) 화백은 조금 수척해 보이는 뺨에 희끄무레한 구레나룻이 적당히 덮여 있었다. 건강을 염려하는 기자에게 그는 가볍게 웃으며 "내일 광고촬영이 있는데 그쪽 요청으로 면도를 안 한 것뿐"이라며 "술ㆍ담배는 안 되지만 컨디션은 문제없다"고 말했다. 이 화백은 1982년 스물여덟의 나이로 '공포의 외인구단'을 선보이며 신드롬을 일으켰고 이후 '아마게돈' '남벌' 등 굵직굵직한 작품들로 인기를 모으며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했다. 또 최근에는 특유의 호쾌한 그림 스타일로 각색한 만화 삼국지를 선보였다. 왕성한 작품활동을 이어가는 그에게 인생과 만화 얘기를 들어봤다.


◇'달동네 왕자'에서 '그대는 우리의 미래'로=1954년 초여름 경북 포항에서 농사 짓는 부모 밑에 태어난 그는 넉넉지 못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더구나 여덟살 되던 해 누전사고로 부친을 잃으면서 형편은 더 기울었다. 식구들은 모두 저마다 생계에 내몰렸지만 작가는 장남으로 학업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달동네 왕자'였어요. 온 집안의 기대, 특히 '그대는 우리의 미래'라고 자주 말씀하던 할머니 덕분에 절대권력을 누렸습니다. 부담이 당연히 있었지만 그게 또한 인생 아닙니까. 절대권력ㆍ절대책임."

그런 그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만화를 끄적거리기 시작하니 집안에 곱게 보일 리 없었다. 덕분에 현재 그에게는 습작시절의 원고가 없다. 모두 할머니가 내다 태워버린 탓이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그는 미술대나 예술대 진학을 꿈꿨지만 뜻 밖에 '색약(특정한 색을 인식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 판정을 받아 응시자격 자체를 잃는다. 게다가 군부시절이던 당시 북한 인민군이었던 작은 삼촌의 경력도 부담이 됐다.

몇몇 기성만화가의 문하생 생활을 거쳐 28세였던 1982년 드디어 그의 출세작 '공포의 외인구단' 시리즈를 내놓았다. 그의 말처럼 생활이 확 바뀌었다. 이어 '카론의 새벽''블루엔젤' 등으로 성인만화 시장을 이끌었고 '아마게돈'은 애니메이션으로까지 제작됐다. 1994년에는 '남벌'로 다시금 그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30대의 10년이 지나고 40대에는 어려운 시절이 왔다.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로 초빙된 기쁨과 동시에 '천국의 신화' 시리즈가 음란ㆍ폭력 시비에 휘말렸다. 2003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날 때까지 꼬박 5년을 시달렸다.

그는 "암울한 40대, 술과 골프로 점철된 시기를 보냈다. 작업이 싫었고, 재판에 영향을 미친다는 우려도 있었다. 해당 출판사는 재판을 포기하고 계약금까지 되받아갔다. 결국 대법 판결이 났지만 '음란ㆍ폭력이 아니다'라는 고법 판결과 달리 법 항목이 바뀌어 적용할 사안이 없다는 기분 나쁜 판결이 나왔다"고 털어놓았다.

40대를 거치며 건강이 많이 상했다. 성대결절이 심해지며 담배를 끊었지만 폭음 탓에 당뇨가 왔고 결국 지난해에는 위암 판정을 받고 수술까지 했다. 이후 술ㆍ담배를 모두 끊었다.

◇"만화계는 종이책 시절이 훨씬 더 풍요로웠다"=웹툰의 활성화는 많은 만화가 지망생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 컴퓨터는 작가가 혼자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고 인터넷은 배출구를 열어줬다.

하지만 작가는 시장이 웹툰 중심으로 바뀌면서 만화가들이 처한 상황이 예전보다 더 어려워졌다고 지적했다. 과거 종이책 중심 시장에서는 대본소(만화방)들이 몇몇 스타 작가들의 책만 사는 게 아니라 다른 작가들의 책도 함께 구비해 기본적인 수요가 있었다. 독자들이 기왕 만화를 보러 온 김에 여러 책을 함께 소비했다는 얘기다. 또 주간ㆍ월간 만화잡지가 잘되던 상황에서 스타 작가의 원고료가 물론 3~4배는 높았지만 그 책에 함께 실리는 비인기 작가들의 수입도 어느 정도 보장됐다.

"그땐 한 작가가 뜨면 같은 잡지에 실린 19명 정도의 비인기ㆍ신인 작가들도 함께 먹고 살았어요. 요즘은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으로 좋아하는 작가만 보고 끝입니다. 인기 웹툰의 경우 광고나 조회 수에 따라 수입이 배분되는데 (다른 작가들도 함께 팔리는) 주변효과가 없어 예전보다 양극화가 훨씬 더 심해요."

많이들 반대로 생각하는데 예전에 전체 작가의 90% 정도가 먹고 살 만했다면 이제는 2% 정도만 편하고 나머지는 배고픈 게 현실이라고 한다.

또 스타 작가를 중심으로 문하생이 있던 구조가 작가 1인 제작체제나 그때그때 팀을 꾸려 프로젝트별로 진행하는 구조로 바뀌며 양극화가 심화됐다고 한다. 당시에는 한 작가가 뜨면 문하생들의 생활도 모두 해결됐지만 이제는 저마다 프리랜서로 재편되면서 수입이 줄었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철저히 세분화돼 웹툰의 경우 작가와 어시스턴트 간에 인터넷으로 피드백을 주고 받고, 심지어 얼굴 한번 안 보고도 작품이 끝나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주로 컴퓨터로 작업하게 되면서 혼자 하는 작가가 늘었고 문하생을 두기보다 그때그때 필요한 인력을 구해 팀을 꾸리고 해체합니다. 연재를 시작하면 4~5명이 북적거리며 일하던 시절과 달리 요즘 작가들은 외롭게 작업해요."

◇한국 웹툰 미래 밝다=그럼에도 작가는 웹툰에 대해, 그리고 우리 만화가들의 해외 진출에 대해서도 높은 가능성을 점쳤다. 인터뷰 전날까지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 참가했던 그는 유럽 출판시장에서 한국 웹툰 문화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몸으로 느끼고 돌아왔다. "도서전 한국 부스에서는 어떻게 무료 서비스가 가능한지, 그들도 한국 시장에 참여할 수 있는지 등 현지 만화가들의 문의가 쏟아졌어요. 일부에서 여러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지만 국내 만화가 지망생들에게 웹툰은 '축복'입니다."

작가는 만화 선진국인 미국이나 일본ㆍ유럽과 비교할 때 국내 만화계가 가져갈 수 있는 경쟁력도 웹툰에 있다고 진단했다. 할리우드를 통해 영화화가 가능한 미국, 강력한 내수시장이 있어 애니메이션 강국으로서 만화시장을 견인하는 일본, 여전히 종이책으로서의 만화시장이 살아 있는 유럽 국가들과 어떤 차별점을 보았을까.

그는 "국내 만화계가 내수시장 조성에는 실패했지만 웹툰에서 가능성을 확인했다. 뛰어난 인터넷 환경을 적극 활용해 시장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미국이나 유럽ㆍ일본 같은 시장 모델은 인구 1억명 이상의 내수시장이 필요하지만 그렇지 못한 아시아는 웹툰이 롤모델이 될 수 있다. 특히 이 나라들이 기존 시장에 안주하며 인터넷 플랫폼에 관심이 없는 지금이 기회"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작가는 여태껏 웹툰 작업을 해본 적이 없다. 여전히 펜 작업을 고수하는 그에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오른다. 이에 대해 그는 "종이책이 좋기도 하지만 '무료제공'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신인 작가들이 자신을 알리는 채널로 활용하는 것은 좋지만 굳이 나까지 그럴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었다. 물론 내 만화를 더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고 싶은 마음이 들면 언제든 시작할 수 있다는 기분이었다"라고 말했다.


마음이 바뀐 걸까. 그도 차기작을 포털에 연재할 계획으로 네이버와 접촉하고 있다. 시기는 내년 7월 정도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작가가 태어난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우리 현대사를 그릴 다음 작품에 대해 "이제 포털도 어느 정도 여건이 성숙했다고 본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만화를 보고 싶어하는 40~60대 독자들도 충분히 많다. 기본적으로 유료로 제공될 것이고 내 40~60대 독자들이 충분히 이용할 만하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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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만화 채널, 포털은 적극적인 만화산업 참여를=작가는 만화시장 활성화와 관련해 정부보다 포털서비스의 역할에 더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공모로 검증된 작가들을 엄선해 정부 차원에서 지원할 수 있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현실적으로 어려운 '이상'일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설사 좋은 작가를 선발해도 꾸준히 그 수준을 유지하거나 지속적으로 작품을 내놓을 수 있을지가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프랑스 앙굴렘국제만화축제에 당장 보내도 될 만한 뛰어난 작가를 지원해도 항상 시비가 뒤따릅니다. 잘나가는 작가를 보내면 일부에서는 꼭 '선택과 집중'이 유효한 전략이냐고 따지고 그렇게 선발된들 작가가 꾸준히 좋은 작품활동을 할 수 있을지도 사실 미지수예요. 가능하다면 정부 차원에서 애니메이션 채널을 운영하며 독자ㆍ시청자의 저변을 넓히고 나아가 아리랑TV처럼 해외에 널리 알리는 역할까지 해주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그는 포털사이트들이 '출판사는 제작, 포털은 서비스'라는 식의 구분에서 벗어나 만화산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미미한 수준인 신인 작가 발굴과 육성, 투자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얘기다. 기획단계부터 함께 해 작가가 작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착수금을 지급하고 종이 만화책도 출간하면 만화산업 발전에 더욱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네이버 라인처럼 회원 수가 수억명인 플랫폼을 이용해 해외시장 진출 및 마케팅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현세가 꼽는 최고 만화가는
"역사 소재 작품만 파고든 이두호 화백·시라토 산페이 존경"




인터뷰가 마무리될 즈음 작가가 존경하는 만화가, 최고의 작품에 대해 물었다. 그는 대뜸 '머털도사'로 잘 알려진 이두호 화백을 꼽는다. 이유인즉 "감정기복이 심하고 호기심이 많은 나와는 정반대로 스스로를 통제하고 인간관계에서도 넓은 포용력을 발휘하는 분이다. 무엇보다 평생 조선사에 천착해 깊이 있는 작품들을 내놓았다"는 것.

해외로는 시라토 산페이(白土三平)의 '가무이전(傳)'을 들었다. 막부시대 말기 하층민을 주인공으로 계급 간의 갈등을 그린 이 만화는 한때 유학생들에게 일본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로 꼽혔다. 이 화백은 "평생 일본의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만 그리며 닌자ㆍ농민ㆍ노예 등 낮은 계급의 주인공을 통해 당대의 현실을 보여줬다. 작품 속의 치열함과 소신은 물론이고 여든이 넘어서도 꾸준히 작품을 내놓는 자세까지 존경할 만한 부분이 많다"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이 화백이 평가하는 자신의 최고 작품은 무엇일까. 인기가 많았던 '공포의 외인구단'이나 '남벌'일까. 그는 단호하게 "없다"고 말했다. '내 인생 최고의 작품은 다음 작품' 같은 대답이 나오려나 하는데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한번도 처음부터 끝까지 만족스러운 작품이 없었어요. 대개 최소한 한 회 정도는 '넘어가자'는 마음으로 느슨하게 그린 게 보입니다. 천성적으로 호기심이 많아 평생 같은 소재를 두 번 다룬 적이 없었으니 만화가 질리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옥의 티'가 많았고 그래서 만족하지 못합니다."



He is…



▲1954년 경북 포항

▲1973년 경주고

▲1981년 '시모노세끼의 까치머리'로 까치 오혜성 탄생

▲1982년 '공포의 외인구단' 시리즈 시작

▲1994년 '남벌' 연재 시작

▲1996년 '천국의 신화' 시리즈 시작

▲1998년~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



이재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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