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금융사고 불감증'이 화 키웠다

KB사태·농협 등 대형사건 터져도 되레 여수신 늘어<br>"계좌 옮기겠다" 말만 무성… 사태 진정되면 고객수 여전


카드사의 대규모 고객정보 유출로 불안감 이 확산된 가운데 21일 서울 서대문구 농협은행 지점을 찾은 한 고객이 개인정보 추가 유출 여부 등을 확인하기 위해 순번 대기표를 뽑고 있다. 평상시 한산했던 은행 창구는 카드 재발급 등을 신청하려는 고객들이 늘면서 하루 종일 북적댔다. /권욱기자


"계좌 옮기겠다" 말만 무성… 사태 진정되면 고객수 여전

사상 초유의 개인정보 유출은 금융사고에 대한 불감증으로 발생했고 지금과 같은 불감증이 이어질 경우 제2·제3의 대형 금융사고가 재연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신한 지배구조 갈등이나 지난해 ISS발 KB금융 사태, 농협 전산망 다운이나 현대캐피탈 해킹 같은 대형 사건·사고에도 불구하고 영업에 지장이 없고 도리어 여수신은 증가하자 금융회사들이 사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얘기다.


사고가 발생하면 중장기적 흐름에서 고객이탈이 현실화해야 사고에 신경을 쓰게 되는데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은 정반대다. 아이러니하게도 고객들이 이 같은 사태를 자초한 꼴이다. 저축은행 영업정지와 뱅크런 현상이 반복되는 것과 흡사하다.

21일 금융당국과 금융계에 따르면 1억건에 달하는 카드 정보유출로 카드 재발급과 해지 등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마저도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안일한 전망이 금융권 내에서 나오고 있다. 마케팅만 강화하면 언제든 고객을 늘릴 수 있다는 점을 과거 대형 사고에서 배웠고 이것이 현재 금융권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2010년 9월 신한은행의 신상훈 전 신한금융지주 사장에 대한 고소로 시작된 '신한사태' 이후에도 신한은 계속 몸집을 불려나갔다.

2009년 말 기준으로 9개 시중은행 가운데 수신점유율이 15.5%(123조원)였던 신한은행은 2010년말 15.4%(129조원)로 소폭 낮아졌지만 2011년에는 15.9%(143조원)로 뛰어올랐다. 대출은 계속 늘었는데 8개 시중은행 중 2009년 말 14.9%(121조원)이었던 점유율은 2010년에는 15.2%(127조원), 2011년에는 15.5%(139조원)까지 증가했다. 당시 비자금 조성과 차명계좌 의혹 등이 불거져나오면서 신한에 대한 고객들의 신뢰도가 떨어졌다는 얘기가 돌았지만 실상은 달랐다.지난 2011년 4월 전산망 마비라는 대형 사고를 일어났던 농협은행도 마찬가지다. 2010년 말 14.7%(123조원)였던 수신점유율은 사고 이후인 2011년 말 15.1%(135조원)으로 오히려 불었다. 대출도 그런데 2010년 말 14.1%(119조원)에서 2011년에는 14.4%(128조원)로 올라갔다. 거래계좌를 옮기겠다는 고객이 많았지만 찻잔 속 태풍이었다. 2009년 말 강정원 전 은행장이 지주회장 후보에서 물러난 KB 사태 때도 국민은행은 대출은 다소 줄었지만 2010년 동안 수신점유율이 0.2%포인트 상승했다. 지난해 ISS 사건 때도 그랬다. 2011년 4월 해킹사건이 일어난 현대캐피탈도 2010년 말 총대출잔액 18조7,880억원에서 2011년 말에는 19조6,158억원으로 약 4.4% 증가했다.


.사고가 발생하면 당장 "계좌거래를 옮기겠다" "주거래은행을 바꾸겠다"는 말이 쏟아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잠잠해지는 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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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금융사가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신규 고객을 끌어왔을 수도 있지만 금융의 생명인 신뢰를 깨뜨린 곳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줄곧 몸집을 불려나가는 상황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사태로 NH농협카드의 해지·정지 카드 수가 20만장에 달한다고 하지만 사태가 진정되면 다시 예전 수준으로 고객을 늘리지 않겠느냐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신뢰는 한 번 깨지면 다시 쌓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신뢰가 무너져도 영업에 별다른 영향이 없다"며 "자연스레 고객을 우습게 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전했다. 사고가 일어났어도 "다른 곳도 상황은 비슷하지 않겠느냐"와 같은 불감증이 일차적으로 이런 상황을 더 만든다는 것이다.금융사 간 별 차이가 없다는 점도 고객들이 문제가 있는 금융사를 다시 찾게 하는 원인이 된다. 제대로 된 경쟁이 없다 보니 은행 간, 여신전문금융회사 간 큰 차이를 발견하기 힘들다.

A은행이나 B은행이나 제공하는 상품구성이나 서비스가 다를 바 없다 보니 사고가 터진 후에도 그냥 계속 이용하는 것이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얘기다. 금융회사뿐만 아니라 고객들 역시 불감증에 젖어 있다는 뜻이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금융의 기반인 신뢰라는 개념이 우리나라에 있는지 자체가 의문"이라고 설명했다. 1차 저축은행 영업정지 1년여 만에 솔로몬과 미래 등 대형 저축은행들이 줄줄이 영업정지를 당하고 여기에 예금보호한도를 넘어 돈을 맡긴 고객이 수만명에 이르는 것도 결국은 금융사고에 대한 불감증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다.

당국의 안이함도 금융권과 고객들의 불감증을 키우고 있다. 카드정보 유출 때는 카드사 최고경영자(CEO) 등이 자진해서 물러났지만 그 이전만 해도 CEO들은 당국의 화살을 피해나갔다.

카드정보 유출 건도 지난 13일 최종구 금융감독원 수석부원장이 금융권 정보보호최고책임자(CISO) 90여명을 불러 긴급회의를 했다가 하루 만인 14일 신 위원장이 금융권 수장들을 다시 불러모아 회의를 했다. 사안의 심각성을 잘못 판단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부분이다. "금융당국의 허술한 보안 시스템, 감독당국의 부실한 감독, 정부의 안이한 불감증이 만들어낸 총체적 인재(김진표 민주당 약속살리기위원장)"라는 말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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