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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가장 큰 적은 우크라이나도, 서구권도 아닌 외환시장이다."(뉴욕타임스)
우크라이나 사태를 둘러싼 푸틴 대통령의 도박이 유가하락이라는 암초를 만나 러시아 경제를 파국으로 몰고 가고 있다. 루블화의 추가 추락을 제어하지 못할 경우 지난 1998년처럼 디폴트(채무불이행)를 맞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나온다.
15일(현지시간) 러시아중앙은행(CBR)은 이날 루블화가 달러 대비 64.23을 기록하며 하루 만에 10% 추락하자 심야에 긴급회의를 갖고 기준금리를 6.5%포인트 인상하는 초강수를 뒀다. 루블화 가치는 올해 들어서만 달러 대비 95% 넘게 추락해 주요국 통화 가운데 가장 큰 폭의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와 이와 관련한 서방권의 제재가 루블화 폭락의 시발점이 됐지만 최근에는 유가급락이 더 큰 원인이 되고 있다. 러시아는 전체 수출액의 68%, 국가 재정의 50%를 차지하는 석유 및 천연가스 가격이 고꾸라지면서 러시아 경제가 직격탄을 맞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당시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원유증산 결정을 내리자 국제유가가 폭락하면서 러시아의 국가 디폴트로 연결됐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CBR의 기습적인 금리인상은 해외 투자가들에 거부하기 힘든 당근(고금리)을 제시함으로써 더 이상의 자본 엑소더스(탈출)를 막겠다는 것이다. 올해 러시아를 빠져나간 자본은 1,340억달러, 내년에는 1,20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CBR는 추정하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조치가 가져올 비용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2013년 1.3% 성장에 그친 러시아 경제는 올해 제자리걸음(0.5%)에 머물 것으로 전망되며 내년에는 '마이너스' 성장이 예상된다. CBR는 내년 유가가 60달러선에 머물 경우 오는 2015년 러시아 국내총생산(GDP)이 전년 대비 -4.7%에 머물 수 있다고 이날 경고했다.
루블화 가치의 폭락으로 러시아 국민들은 엄청난 경제적 피해를 입고 있다. 현재 러시아 가계 저축의 80%가량은 루블화로 이뤄져 있다. 여기에 인플레이션마저 극심해 현재의 루블화 추락이 계속될 경우 러시아 물가는 당국이 마지노선으로 삼고 있는 연 10%를 넘어설 수 있다고 타임지는 보도했다.
다만 러시아 경제의 펀더멘털이 개선돼 1998년 상황까지 악화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1998년 디폴트 당시 125억달러에 불과했던 러시아의 외환보유액은 11월 현재 4,188억달러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최근의 급격한 자본유출과 맞물려 환율 방어비용으로 대거 소진될 위기에 놓이면서 안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러시아는 루블화 방어를 위해서만 올해 800억달러를 쏟아부었다.
전문가들은 CBR의 파격 조치가 당분간 통화시장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평가하면서도 근본적 차원의 대책은 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모으고 있다. 현재의 통화 불안의 원인이 유가 등 외부 변수라는 점에서 러시아 당국이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배리 에첸그린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에너지 가격 하락, 서방권 제재, 광범위한 부패 등 러시아 경제가 안고 있는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컨설팅 업체인 유라시아그룹은 CBR의 결정 직후 "이번 조치가 별다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지금까지의 통화정책을 뛰어넘는 비전통적 수단을 동원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국경 간 자본거래 제한 등의 급진적 조치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당장 이달 18일로 예정돼 있는 '국민과의 대화' 자리에서 푸틴 대통령이 루블화에 대해 어떤 언급을 내놓느냐가 초미의 관심사가 될 것이라고 유라시아그룹은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