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들의 건배 구호는?” “지금 이대로!”. 10년 전 외환위기 때 떠돌았던 우스갯소리다. 경제난 속에서 부자들은 오히려 살기가 더 편한 상황을 빗댄 것이다. 정말 그랬다. 금리는 20%를 넘나들어 현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재산이 불어났다. 기름값을 아끼느라 길거리의 차가 줄어 교통체증 짜증도 사라졌다.
스키장에 가서는 리프트를 타기 위해 몇 시간씩 기다리지 않아도 됐다. 골프는 앞뒤 팀 보이지 않는 ‘황제골프’를 즐겼고 무료 추가 라운딩도 가능했다. 술집 등 유흥업소에서는 칙사대접을 받았다. 불황으로 손님이 뚝 끊긴 탓이었다.
돈 벌기도 쉬었지만 쓰는 재미도 그만이었다. 그러니 서민들이 불황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과 달리 부자들은 ‘이대로’를 외친다(진짜 그랬을 리 없겠지만)는 것이다.
가라앉는 수출, 내수진작 절실
2008년 겨울, 또다시 경제혹한이 닥쳤다. 외환위기 때는 우리 경제만 망가졌기에 미국 등 외부의 도움으로 국가부도 위기를 넘기고 수출로 난국을 타개해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ㆍ유럽의 금융시장이 망가졌고 그 후폭풍으로 세계경제가 얼어붙었다.
과거 이름만으로도 경탄의 대상이던 세계적 기업들의 실적악화ㆍ감산ㆍ감원ㆍ파산위기 소식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지고 있다. 내년 미국ㆍ유럽ㆍ일본의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중국 경제도 두자릿수 성장을 마감할 것이라고 한다. 각국이 고강도 부양책으로 안간힘을 쓰고 있으나 상황호전은 커녕 디플레이션의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모두가 제 앞가림하기 바쁜 터라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기 힘들고 세계경제가 무너지고 있으니 수출에 기대기도 어려워진 것이다. 수출위축 현상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나타나고 있다. 지난 11월 수출은 두자릿수의 마이너스 증가율을 기록했다. 바이어의 오더 취소도 급증하고 있다.
수출이 막히면 내수의 숨통이라도 틔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게 여의치 않다. 국내소비는 지난 몇 년간 바닥을 기어왔다. 문제는 소득과 자산가치 감소에 따라 갈수록 소비여력의 고갈이 심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집값이 떨어지고 주가와 펀드가 반 토막, 심지어 4분의1토막 나면서 쓸 돈이 줄어들었다.
펀드 계좌 수가 우리나라 전체 가구 수보다 두배나 많은 2,380만여개라는 점을 감안하면 손실은 서민이고 부자고 가릴 것 없다. 재테크 감각이 뛰어나 불패를 자랑한다는 강남 부자들도 펀드와 부동산에 물린 사람이 부지기수다. 그들의 투자 규모가 상대적으로 커서 손실 액수도 더 많다. 그래서인지 부자들의 소비심리가 더 냉각된 것(한국은행 조사)으로 나타났다. ‘지금 이대로!’를 외쳤다는 10년 전과는 양상이 사뭇 달라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돈을 쓸 수 있는 계층은 부자들이다. 3ㆍ4분기 가계동향에 따르면 소득보다 지출이 많은 적자가구가 29%로 전년 동기보다 1%포인트 늘었고 특히 소득 하위 30% 계층의 경우 50.7%나 됐다. 서민층의 소비는 한계에 달한 것이다. 반면 상위계층은 소득이 늘었다. 자산감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비여력이 있다는 이야기다.
소비여력 있는 부자들이 돈을 써야
없는 사람일수록 경제혹한의 고통을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받는다. 경제가 더 가라앉는 것은 막아야 한다. 그러려면 소비가 살아나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여력 있는 사람들이 돈을 써야 한다. 이달 중 환급될 종합부동산세액이 6,300억원에 이른다. 부자들이 우선 이 돈만이라도 아낌없이(?) 썼으면 좋겠다.
쇼핑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외식도 하면서. 물론 해외가 아닌 국내에서 가급적 국산품으로 말이다. 온정의 손길이 절실한 소외계층을 위해 기부하면 정말 멋있게 쓸 줄 아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부자들이 돈을 쓰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줄 필요도 있다. 그 첫걸음은 그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부터 바꾸는 것이다. hulee@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