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외환위기 그후 10년] <1부-2> 97년 겨울, 아무도 몰랐다?

냉혹한 외국자본 생리 몰라 '우왕좌왕' <br>정부, 10월 한달간 1조원 빠져나가도 심각성 애써 외면<br>국제금융 인맥도 거의 없어 '우물안 개구리' 정책 일관<br>"재경원 만든다며 국제금융국 없애 위기상황 부채질"



이경식 전 한국은행 총재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한다고 판단한 때는 언제였느냐”는 질문에 “(97년) 11월 3일 쯤으로 기억난다”고 말했다. 강경식 전 부총리도 “솔직히 11월에 가서야 IMF에 의지하지 않으면 망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답했다. YS 정부는 11월 21일 IMF 구제금융 신청을 공식 발표했다. 7월 태국 바트화가 폭락하면서 촉발된 동남아 금융위기가 무서운 속도로 북상을 계속 했던 바로 그 순간에도 우리 경제의 책임자들은 “한국경제의 펀더맨탈을 굳건하게 믿고 있었다.이경식 전 총재는 “11월 3일부터 외국인의 국내 주식투자한도를 (26%로) 늘리는 조치가 취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외국자본이 무섭게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이제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토로했다. 김인호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도 “홍콩 증시 폭락 보름 만에 (급격한 외자 유출로) IMF 지원까지 검토해야 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될 지는 몰랐다. 국제금융자본의 비 합리적이고 냉혹한 생리(리더가 이끄는 대로 이동하는 이른바 ‘기러기 효과’)를 몰랐다”고 말했다. 강경식 당시 경제부총리 역시 “솔직히 말해 외국자본은 생리상 국가경제의 펀더맨탈을 보기 보다는 단기 수익에 더 집착한다는 사실을 잘 몰랐던 것은 사실이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 해 10월 27일 모건스탠리 증권은 ‘아시아 지역에 투자된 자금을 회수하라’는 긴급 전문을 날렸고, 채 일주일도 안된 11월 5일 홍콩의 페레그린증권은 한국경제에 사형선고를 내렸다. ‘Get Out of Korea. Right Now(지금 당장 한국을 떠나라)’는 보고서에서 이 증권사는 ‘이유 불문하고 당장 한국에서 빠져 나오라’는 보고서를 전 세계에 타전한 상태였다. 연초 한보 부도에 이어 7월에는 기아가 무너지고, 10월 한 달에만 1조원 이상의 외자가 한국을 빠져나갔지만 정부가 사태의 심각성을 애써 외면하려 했다. 국내 관계자들은 위 아래 할 것 없이 국제금융시장의 생리를 너무 몰랐고, 전문가들을 찾아 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위기는 무지에서 비롯됐고, 뼈 속 깊이 병이 퍼져도 책임자들은 우왕좌왕했다. 97년 하반기 들어 외신들이 우리의 외환 보유고가 바닥나고 있다는 식으로 연일 급보를 띄우면서 사정이 더욱 악화된 측면도 있는 데 , 강 전 부총리 등 핵심 관계자들은 그저 ‘무책임한 보도’ 정도로만 이해했다. 하지만 사실을 따져 보면 우리의 무지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당시 문제가 됐던 것은 ‘가용 외환보유고’였는데 이와 관련해 한국은행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회고했다. “어느 날 외신기자가 찾아와 외환 보유고 사정을 취재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 기자는 놀랄 정도로 세밀한 부문까지 취재를 마치고 확인 작업에 들어 온 것이었다. 당시 우리는 우리 기업이나 은행들이 해외에서 빌려 준 돈도 외환보유고로 잡고 있었는 데 외신 기자들이 생각하는 외환보유고란 몇 일 만에 즉시 현금화할 수 있는 달러표시 자산이었다.나머지는 무의미하다는 얘기였다. 솔직히 뜨끔했고 많이 놀랐다.” ◇국제금융 인맥은 없었다= “97년 당시 우리의 국제금융인맥은 인도나 필리핀 보다 형편 없었다.“ 최공필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의 말이다. 김중수 경희대 교수(전 KDI 원장)도 “국제금융 전문인력은 없었다. 내부만 봤다.”고 인정했다. 외환위기 당시 국제금융 인맥은 이들이 지적한 것처럼 보잘 것 없었다.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경험하게 된 데는 이처럼 외자의 생리를 제대로 알지 못한데다 인적자원도 거의 형성되지 않았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강 전부총리는 국제 금융계의 거물들을 만나며 돈을 끌어들이려 동분서주했지만, “갑자기 경제부총리가 되다 보니 국제 무대에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토로했다. 국제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이른바 ‘안면 장사’는 필수였는 데 당시 우리 금융 인맥으로는 그 같은 일을 담당할만 만한 전문가가 거의 전무했다는 것. 산업자본의 발전에만 치우쳐 금융자본은 그저 대부업 수준에 머물러 있어 민간 금융 인력이 성장할 여지도 적었지만, 관료 시스템 역시 국제 금융의 흐름과는 완전히 동 떨어진 조직으로 일관했다. 가령 정부는 OECD 가입에 따른 자본시장 개방으로 단기 외국자본이 유입될 가능성이 없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결과는 금융권의 도덕적 해이로 불릴 만큼 은행들의 무분별한 단기 외화 빌리기가 일어났다. 외환위기 당시 금융라인에 있었던 재경부 고위 관계자는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됐다. OECD 회원국이 되면 외국에서 돈을 빌려줄 때 대손충담금을 쌓는 규정이 없었던 것이 그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단기 외채시장은 이미 93~95년에 개방이 된 상태”라며 “결국 우리가 알지 못한 대손충당금 미 적립 규정이 외국에서 우리 은행에 돈을 더 많이 꿔주게 됐고, 그것이 재앙으로 이어진 게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재경원 탄생이 재앙?= 국제금융 인맥이 자취를 감추게 된 주요 원인을 찾자면 94년 12월에 단행된 재무부와 경제기획원 통합(재정경제원으로 일원화)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김영삼 대통령 지시에 의해 재경원이라는 통합 조직이 만들어 지는 데 능력과 업무 등을 고려치 않은 물리ㆍ기계적 통합이 단행됐기 때문이다. 그 당시 통합 작업에 참여 했던 재경부 관계자는 “윗선 지시가 국ㆍ과장은 (기획원과 재무부) 똑 같이 배분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과장 자리를 재무부, 기획원 동 수로 무 자르듯이 잘랐다“고 회고했다. 때문에 업무 유관성과 전문성은 이리 지리 찢겨나가며 기이한 조직이 만들어졌다. 국제금융국이라는 조직 자체가 아예 사라졌고, 국제금융 업무는 증권과 합쳐지면서 이름도 긴 ‘국제금융증권심의관실’에서 처리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국제금융만 전문적으로 볼 수 있는 인물과 직위가 사라진 것이다. 재경부의 한 관계자는 “국제금융증권심의관실은 말이 국제금융이지 증권시장 보는 데 급급했다. 96~97년 당시 외환보유고가 줄어든다든지 환율이 요동친다든지 하는 등의 긴급 현안은 제대로 취급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당시 재경원 차관으로 재직하면서 국제금융 업무를 맡았던 강만수 디지털경제연구소 이사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재경원 탄생 당시 국제금융국을 없앤 것이 97년 외환위기의 현실적인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국제금융국이 없는 나라는 아무데도 없었다. 눈이 하나인 나라에 가면 눈이 두 개인 사람이 병신이 되는 수 밖에 없었다.“ 외환위기 상황을 다룬 98년 경제백서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들어있다.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경제 주체가 등장했다. 바로 외국 자본이다’ 한마디로 96년 OECD 가입과 더불어 자본시장을 개방했지만 정작 외국자본의 냉혹한 생리를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 당시 경제백서 작성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이후 무엇이 잘 못 됐나 생각했다. 결론은 우리가 외국자본을 컨트롤 할 수 있었다고 착각한 것이 실수 였다는 것을 알았다”고 실토했다. ● 환란 다가오는데 금융개혁법안만 신경
"사태수습 기회 놓쳐"
'10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밥그릇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최근 한국은행과 금융감독원은 '신용카드사의 대출규모'를 놓고 서로 엇갈린 분석과 대안을 내놓으며 시장의 혼란을 야기했다. 한은이 카드대출 억제책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이자, 금감원은 관련규제를 검토할 만큼 건전성이 취약하지 않다며 평행선을 달렸다. 지난 11월부터 시작된 외화대출 공동검사도 양 기관의 신경전으로 파행으로 치달았다. 여기에 한은의 금융권에 대한 조사 권한을 주는 한은법 개정을 둘러싸고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이 같은 갈등은 이미 10년전부터 예고돼온 일이다. 97년11월10일 강경식 부총리와 이경식 한은 총재,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 등 훗날 '환란의 주역'으로 지목된 3명은 전날에 이어 서울 시내 모처에서 만나 '금융개혁법안'을 회기 내 통과시키는 문제를 밤 늦도록 논의했다. 이들이 "은행감독원을 한은에서 분리한다"는 원칙만 지켜진다면 국회에서 수정도 가능하다는 선에서 최종 합의를 본 것으로 전해지자, 한은 직원들은 '총파업'을 선언하는 등 진통이 일파만파로 번져갔다. 14일 오전 한은 직원 400여명은 국회 재경위에 참석하려다 저지를 받고 경찰과 대치중 176명이 무더기로 경찰에 연행됐으며 역대 한은 총재들이 이례적으로 기자회견을 갖고 금융개혁법안에 반대하고 나섰다. 동남아 외환위기가 서서히 한국 경제에 파고들고 있었지만 이를 인지해야 될 중앙은행은 97년 한해동안 금융개혁법안에 휩싸여 있었다. 이 때문에 뒷날 감사원의 '외환 및 금융관리실태 특별감사결과'에서 정부가 금융개혁법안의 국회 통과에만 주력하다가 11월14일 뒤늦게 IMF 금융지원요청이 불가피함을 보고, 범 정부 차원에서 사태를 수습할 기회를 놓쳤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결국 이후 IMF 이행 합의문에 물가안정을 주임무로 하는 한은 독립과 금융감독기구를 통합해야 한다는 내용의 금융개혁법안이 담기며 일단락됐다. 이경식 전 총재가 지금까지도 건전성 감독 부분을 아쉬워 하는 것도 한은과 금융감독원과의 갈등양상이 예고됐기 때문이다. 감독권 이외에 통화정책에 대한 한은과 재경부간 갈등도 깊어졌다. 통화정책에 대해 법상 독립은 보장됐지만 최근 몇 년동안 금리결정 과정에서 재경부의 물밑(?) 간섭이 집요할 정도로 이어졌다. 지난해 출범한 한국투자공사(KIC)를 놓고 한은이 금리독립을 위해 재경부에 합의해준 산물이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다. 외환위기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적된 금융개혁법안이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관계기관의 밥그릇 싸움에 밀려 금융산업의 발전과 선진금융제도의 정착이라는 당초 목적이 떠밀리고 있는 셈이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