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송현칼럼] 도하 라운드 결렬과 변화

지난달 세계무역기구(WTO)는 지난 2001년 시작됐던 소위 도하라운드의 결말이 무기 연기됐음을 선언했다. 인도의 협상대표인 카말 나스(Kamal Nath) 상무장관이 “도하라운드는 완전히 죽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중환자실과 화장터 중간쯤 있다”고 표현했을 정도로 말이 좋아 무기 연기이지 사실상 붕괴라고 할 수 있다. 도하라운드는 선진국의 농업시장을 개방해 후진국이 수출을 통한 경제발전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내세우면서 소위 ‘개발 라운드’라는 구호를 걸고 시작했다. 그러나 선진국들이 농업시장을 개방하고 농업 보조금을 낮춘다고 해도 후진국에 얼마나 이익이 돌아가는지조차 불분명하다. 선진국이 주로 보호하는 농산물은 밀ㆍ쇠고기ㆍ낙농제품 등 온대지방 농산품들인데 대부분 열대지방에 속하는 후진국의 농민들은 수입이 개방된다고 해도 이러한 제품을 생산할 수 없다. 따라서 선진국 농업 개방의 덕을 가장 크게 보는 것은 주로 미국ㆍ호주 등 다른 선진국들이다. 후진국 중에는 브라질ㆍ아르헨티나 등 비교적 부유한 나라, 그리고 그 중에도 대규모 기업농들이 이득을 보게 돼 있다. 이에 더해 선진국들은 농업시장 개방의 대가로 후진국들에 혹독한 대가를 요구했다. 공산품 관세를 10% 이하로 낮추고 서비스 시장을 절반 이상 개방할 것을 요구했다. 농업 부문에서도 후진국들이 국민 생계와 밀접하게 관련된 소위 ‘민감 상품(sensitive products)’의 보호를 줄일 것을 요구했다. 후진국들은 WTO의 다자간 무역질서가 깨지면 미국 등 강대국이 양자간 협정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기가 더 쉬워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상당 정도 손해를 보더라도 도하라운드를 관철시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상당한 양보를 했다. 그러나 선진국들, 특히 미국은 자신들의 농업 관세나 보조금은 별로 낮추지 않으면서 후진국들의 공산품과 서비스 개방만 요구해 결국 보다 못한 후진국들이 이에 반발해 도하라운드가 결렬된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점은 도하라운드의 결렬이 국제 사회의 새로운 세력균형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WTO는 형식상으로는 1국 1표에 어떤 나라도 거부권이 없는 유일한 ‘민주적인’ 국제기구이지만 최근까지 사실상 선진국들 마음대로 운영됐다. 선진국들이 원조 및 선별적 시장 개방 등을 무기로 삼아 후진국들을 ‘각개 격파’했기 때문이다. 인도를 중심으로 파키스탄ㆍ말레이시아ㆍ케냐 등 몇 나라가 저항했지만 힘이 부쳤고 선진국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어젠다를 설정해 원하는 만큼은 아니지만 많은 것을 얻어냈다. 그러나 2002년부터 사정이 바뀌기 시작했다. 룰라 정부가 들어오면서 브라질이 인도에 가세해 후진국의 이익을 대변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신자유주의 개혁이 파탄나면서 그때까지 주로 선진국들과 공조했던 아르헨티나도 이들에 가세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도 94년 아프리카국민회의(ANC) 집권 후 충실히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를 따라 신자유주의 개혁을 한 결과가 신통치 않음을 깨달으면서 이 연합에 가세했다. 베네수엘라ㆍ인도네시아 등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2001년에 WTO에 가입한 중국도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배후에서 힘을 보탰다. 이렇게 해서 후진국 연합이 형성되면서 2003년 칸쿤각료회의에서는 선진국들이 외국인 투자의 규제를 어렵게 하는 다자간 투자협정 협상을 시작하려는 것을 저지했고 이번에는 도하라운드 자체를 붕괴시킨 것이다. 세계 경제구도가 재편되고 있다는 신호이다. 지금 우리 정부는 미국 중심의 단극화 체제가 지속될 것을 가정하고 한미 FTA 등 극도의 친미주의적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중심의 단극화 체제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WTO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국제무대에서 후진국들의 영향력과 결속력이 급격하게 강화되고 있다. 인도와 브라질은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요구할 정도가 됐다. 러시아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민족주의적 경제정책하에 경제를 재건하기 시작하면서 국제정치적으로도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미국은 사상 최대의 국제수지 적자와 재정적자, 또 가계저축의 완전 붕괴 등으로 조만간 큰 경제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높다. 국제정치적으로도 이라크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략 등 중동 문제 때문에 점점 고립되고 있다. 우리 정부가 과연 이러한 국제 역학구도의 변화를 이해하고 소위 ‘친미-자주’ 국제전략을 수립한 것인지 의문스럽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