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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휴먼드라마'로 북한 소재 이야기를 담아왔던 스크린이 '첩보 액션'으로 갈아타고 있다.
세계 유일의 분단 체제인 한반도, 그중 폐쇄성이 짙어 내부 속성이 잘 알려지지 않은 북한은 콘텐츠를 만들 때 다양한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는 일종의 '상상력 창고'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극적인 요소를 언제든 알맞게 버무릴 수 있어 콘텐츠 제작자 입장에서 구미가 당긴다. 충무로는 오래전부터 북한을 이야기의 젖줄로 삼아왔다. 1960년대 '전쟁영화',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통일의 바람을 담은 '휴먼드라마'가 큰 줄기였다. 영화 '쉬리'(1999)는 남북 간 서로 다른 이념의 벽 앞에 가로막힌 남녀 사랑을 다뤘고, '공동경비구역 JSA'(2000)는 남북 병사들의 우정과 인간다움을 부각시키며 분단체제의 모순을 드러냈다. '웰컴투동막골'(2005)에서는 남북 병사와 마을주민들의 공동체 정서를 강화해 형제애를 더욱 확장하기도 했다.
올해 개봉했거나 개봉 예정인 북한 소재 영화들은 모두 북한의 정권교체, 정보 당국 안팎의 갈등 등 현실 정세를 반영함과 동시에 체제와 권력에 희생된 한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췄다. 영화 '베를린'에서 표종성(하정우),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동구(김수현), '동창생'의 명훈(최승현)이라는 인물 모두 북한 최고 첩보 요원으로 길러져 활약했지만, 김정은 집권 후 남북관계 변화에 따라 한순간에 제거 대상으로 몰린 인물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24일 개봉 예정인 '용의자' 역시 북한 최정예 특수요원 출신이지만 조국으로부터 버림받고, 남북 첩보조직 내 음모로 처자식까지 잃은 탈북자 지동철(공유)의 이야기가 주축이다.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은 원신연 감독은 최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사상과 이념이 아닌 조국으로부터 버림받고 끝내 처자식까지 잃은 인간 지동철의 생존과 본능에 관한 이야기"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이처럼 최근 관객을 찾는 일련의 북한 소재 영화들은 "한 국가의 무소불위 혹은 비효율성에 희생된 개인이 피해자라는 인식을 기저에 깔고 있다"(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공통점이 있다. 여기에 할리우드 영화 '본 시리즈'와 같은 고강도의 액션을 접목해 볼거리의 풍성함까지 더했다. '용의자'는 "액션의 진화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감독의 바람이 그대로 녹아든 듯, 이제껏 국내 영화에서 한 번도 선보인 적 없는 카 체이싱(자동차 추격전)장면으로 앞서 같은 소재를 다룬 영화와 차별화를 꾀했다. 전반부와 후반부를 합쳐 10여 분 계속되는 자동차 액션 장면은 기존 한국 영화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원격조종차(RDV) 장비를 도입해 촬영했다. 120㎞로 달리는 차량의 정면충돌 장면이나 급경사를 후진하는 장면, 좁은 골목을 휘젓는 자동차 추격 장면 등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북한 소재 영화의 장르적 진화가 엿보이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