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그룹들이 무분별하게 사업확장을 하다가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체제라는 장벽을 만나 비주력업종을 포기하게 됐다.5대그룹이 문어발식 확장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비주력업종에 너나없이 진출한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어발식 확장의 정점(頂點)에는 오너(회장)들이 있다. 각 그룹의 오너들은 경쟁사가 특정 사업에서 재미를 보면 뒤늦게 뛰어들어 진흙탕 싸움을 일삼았으며 비자금마련외에는 이렇다할 계열사 설립의 이유를 찾아보기 힘든 경우도 있었다.
회사돈을 끌어다가 딴살림(개인회사)을 차린 총수도 있다. 심지어 총수의 호사스런 취미생활이 신규사업으로 연장되기도 했다.
오너의 독단에 제동을 걸어야 할 이사회와 주주총회는 거수기 노릇만 하며 문어발 확장을 방조해왔다.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경쟁그룹이 특수(特需)를 만나 떼돈을 벌면 참지 못하는게 재벌들의 특성이었다.
『저들(경쟁그룹)보다 (공장을) 더 크게 지어!』라는 명령으로 표출된다. 외형경쟁은 공급과잉으로 번진다. 대표적인 사례가 석유화학. 지난 80년대후반까지만 해도 나프타 분해시설을 보유한 기업은 유공(현재의 SK㈜)과 대림산업 정도였다.
그러나 90년대초반부터 동남아특수로 유화제품 수출이 호황을 누리자 현대와 삼성, LG가 경쟁적으로 진출해 공급과잉을 연출했다.
79년에 100만톤 남짓(에틸렌기준)했던 국내 시설능력은 현재 500만톤규모로 늘어나 있다. 반도체나 철강도 마찬가지.
모 그룹의 경우, 오너가 경쟁사의 설비 준공식에 초청받는 날은 설비증설이 결정되는 날이었다고 할 정도.
◇비자금 마련용=대한민국에서 어느 정도 덩치를 키운 그룹치고 건설회사를 계열사로 갖고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건설회사는 그룹의 비자금 조성의 주된 창구로 활용됐다는게 업계의 정설. 기업들이 비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사업을 벌인 것은 아니지만, 이들 사업에서 발생하는 온갖 메리트도 신규참여 결정에 상당부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건설업의 경우 노무비를 비롯한 각종 비용을 부풀리는 방식으로 비자금을 뽑아내기 쉽다는 것은 업계의 상식. 과거 정권때 권력층에 제공된 수백억원의 비자금은 대부분 건설회사의 변칙 경리로 처리되었다고 재무담당자들은 전한다.
또 내부거래도 쉬워 한보의 정태수(鄭泰守)총회장은 당진제철소를 세울때 계열사인 ㈜한보에 건설을 맡겨 600억원 이상을 빼돌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부 기업들은 90년대초 아파트 200만호 정책 등으로 건설경기가 최고조에 이르자 비건설업종의 계열사까지 건설업면허를 발급받아 건설사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러다보니 일부 그룹은 건설사를 3~4개씩 거느리고 있는 형국이 됐다.
◇총수의 개인사업=S그룹의 C회장은 항공화물 운송전문회사를 손수 경영한 적이 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은밀하게 정리된 이 회사는 계열사로도 올라있지 않은 비밀기업.
C회장은 출근도 하지 않으면서 이 회사를 경영해왔다. 도시가스를 비롯한 에너지를 주력으로 삼고 있는 다른 S기업의 L회장은 스포츠용품 체인업체를 세워 최근까지 운영을 해왔다. 수익금은 그의 개인경비로 활용됐다. 일종의 아르바이트인 셈이다.
문제는 이같은 「딴살림」이 본가의 살림을 들어내 채워져 왔다는 것. 총수의 개인사업에는 계열사로부터의 대여금과 지급보증을 통한 은행자금이 동원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아의 김선홍(金善弘)회장도 구속전에 이같은 소문에 시달렸다. 아직까지 확인이 되지 않고 있지만, 金회장이 개인회사로 차려놓은 회사가 창원 인근에 두곳이 영업중이라는 내용이었다.
◇총수의 집착=이건희(李健熙) 삼성회장은 세계적인 명차(名車)를 10여대 가량 소유하고 있다. 김석원(金錫元) 쌍용회장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자동차 매니아다.
이들의 취미는 무리한 사업진출로 직결돼 그룹에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쌍용이 대우에 자동차사업을 넘기는 것을 시발로, 삼성도 자동차사업에서 명예로운 퇴진을 하기 위해 협상을 벌이고 있다. 개인의 취미에 대한 강한 집착이 기업을 멍들게 한 셈이다.
물론 이들의 사업진출은 『외국 명차에 뒤지지 않는 좋은 차를 만들어보자』는 측면도 없지 않다.
李회장은 오디오 매니아이기도 하다. 그의 자택에는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유럽산 오디오가 즐비하다는 것이 삼성 관계자들의 전언.
삼성전자는 이건희회장의 지시에 따라 고급오디오 사업에 진출했다가 실패했다.
삼성은 지난 95년 최고급 오디오의 대표 브랜드인 「마크레빈슨」을 만들고 있는 미국의 마드리갈사와 기술제휴로, 「엠퍼러」라는 제품을 발표했으나 100대도 팔지 못하고 사업에서 철수한 상황이다. 【한상복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