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중앙은행 수난시대

물가안정 포기한 채 경기부양 내몰려 독립성 훼손 잇따라<br>돈 풀기 압박에 속속 금리인하<br>정부 금리 산정까지 간섭하고 반기 든 총재는 쫓겨나기도

'시련의 중앙은행장들' 세르게이 이그나티에프(왼쪽부터) 러시아 중앙은행 총재, 프라산 트라이랏와라쿤 태국은행 총재, 시라카와 마사아키 일본은행 전 총재.

글로벌 경제위기로 중앙은행들의 수난시대가 이어지고 있다.

각국 정부들이 경기부양을 위해 '물가안정'이라는 고유의 역할을 사실상 포기하라는 압력을 넣으면서 '중앙은행 독립성'의 대원칙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러시아는 은행대출 금리 산정 등 중앙은행 고유의 권한까지 정부가 빼앗아갈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각국 정부가 눈앞의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돈 풀기를 강요하면서 장기적으로 국가경제와 통화정책의 안정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블룸버그통신은 15일(현지시간) 익명의 러시아 관리를 인용해 "지금까지 중앙은행의 기본임무는 물가안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지만 앞으로는 '정부와 함께 경제성장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추가하는 방안을 러시아 경제부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고 전했다. 나아가 러시아 경제부는 중앙은행에 은행 대출금리를 낮추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러시아 금융부와 중앙은행은 독립성 침해를 이유로 반대하고 있지만 경기부양에 몸이 단 푸틴 대통령이 어떤 결론을 내릴지 아직 불투명한 실정이다. 러시아는 지난해 4ㆍ4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지난 2009년 이후 가장 낮은 2.1%를 나타냈고 러시아 경제부는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지난해 9월 발표한 3.7%에서 2.4%로 대폭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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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인 엘비라 나비울리나가 오는 6월 러시아 중앙은행 총재에 공식 취임할 경우 정부 손에 더 휘둘릴 가능성이 크다. 세르게이 이그나티예프 현 총재는 전형적인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금리인하를 요구한 푸틴 정부와 대립각을 세워왔다. 전날에도 러시아 경기가 후퇴하고 있는데 물가안정을 이유로 기준금리를 8개월째 8.25%로 동결했다. 러시아는 이 외에도 가스와 전기료 인상폭을 낮추고 국영기업들이 연매출의 25%를 배당금으로 출연하는 등 경기부양책도 추진하기로 했다.

환율방어를 위해 금리정책을 동원하라는 정부의 압박에 시달리기는 태국 중앙은행인 태국은행(BOT)도 마찬가지다. 프라산 트라이랏와라쿤 총재는 11일 "밧화 환율을 적정수준으로 관리하기 위해 기준금리(현재 2.75%)를 인하하는 방안을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경제와 통화 안정이라는 중앙은행의 기본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전날 성명서를 하루 만에 번복한 것이다. 태국은행은 밧화가 최근 미국과 일본의 양적완화에 따른 단기 투기자금 유입으로 강세를 보임에 따라 기준금리를 내려야 한다는 정부 압박에 시달려왔다.

일본의 경우 중앙은행이 스스로 독립성을 팽개친 채 정부와 함께 경기부양에 올인하고 있다. 아베 신조 정권은 출범 전부터 '아베노믹스'에 반대의견을 내던 시라카와 마사아키 전 일본은행(BOJ) 총재를 임기만료 20여일 전인 3월19일 조기 퇴임시켰다.

구로다 하루히코 BOJ 신임 총재는 '2년 내 디플레이션 탈출'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중앙은행을 돈 찍는 기계로 전락시켰다는 비판마저 듣는 실정이다. 아베 총리는 야당 총재 시절이던 지난해부터 집권하면 일본은행 총재로 무제한 금융완화에 찬성하는 인사를 밀겠다고 공언하면서 일본은행을 경기부양을 위한 재무성의 출장소 정도로 치부하곤 했다.

한국은행이 9일 기준금리를 인하한 것도 정부 압박에 밀린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실정이다.


박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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