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임종건칼럼] 시대의 退場

4ㆍ15총선이 던지는 가장 명료한 의미는 ‘3김(金)시대’로 상징되는 구시대의 퇴장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김종필(JP) 자민련 총재의 퇴장이다. ‘ 3김’의 ‘마지막 김’이었던 그는총선패배의 충격으로3일 동안 자택에 칩거하며 장고한 끝에 지난 19일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그가 은퇴를 선언한 그날은 공교롭게도 그가 가담했 던5ㆍ16군사쿠데타에 의해 좌절된4ㆍ19혁명 44주년 기념일이었다.그의 귀거래사는 “43년간 정계에 몸담으면서 모든 것을 태워 재가 됐다”였다. 총선으로 퇴장된'3김정치' 그는 61년 35세의 나이에 처삼촌인 박정희 장군이 일으킨 5ㆍ16쿠데타에 가담함으로써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고 80년대 후반 들어 김영삼ㆍ김대중씨 와 더불어 ‘3김정치’의 한 축을 형성했다.김영삼ㆍ김대중씨가 군사정부의 퇴장과 함께 차례로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 JP의 지지는 결정적인 힘이 됐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그는 박정희 정부에서 얻은 ‘2인자’의 이미지를 김영삼ㆍ김대중 정부에까지 이어갈 수 있었지만 자신은 끝내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그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내각제에 둬왔는데 그것 역시 대통령이 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선택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사람이 많다. 그의 내각제에 대한 소신은 결단력이나 비장감으로 무장된 것은 아니었다.기회주의자 또는 실용주의자라는 그에 대한 평가에 걸맞은 수준이었다. 그의 내각제는 정치적 구호였을 뿐 왜 내각제를 해야 하고, 어떻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설득력 있는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내각제의 실현 가능성이 문서로나마 담보된 것은 DJP연합이었으나 김대중 정부의 약속 파기를 맥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승자의 편에 서서 2인자의 지위를 누리던 그가 탄핵정국 막판에 탄핵지지를 선택했을 때 사람들은 잠시 그의 선택이 이전처럼 승자의 편이 될 것인 지를 궁금해했다. 결과로 확인된 것은 총기(聰氣)의 쇠잔이었다. 자민련의 비례대표 1번으로 자신을 올려놓았을 때 이미 패배는 예고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비례대표 2번으로 건설회사 대표를 올려놓았을 때 패배는 더욱 확실해 보였다. 그것이야 말로 청산돼야 할 구태정치의 전 형이었다. 열린우리당이 여성 장애인을, 한나라당이 여성 경제학박사 1호를 각각 비례대표 1번으로 내세우는 모습과는 너무 극명하게 대비됐다. 그 렇게 완강하게 변화를 거부하면서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요행을 바라는 것일 뿐이다. JP의 퇴장에 한가닥 아쉬움도 없지 않다. 그가 걸어온 43년의 정치역정은어느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것이다. 초대중앙정보부장, 집권당과 야당의 대표, 두번의 국무총리, 아홉번의 국회의원을 지내며 그는 무대의 중앙과막전막후에 두루 서 있었다. 비록 유권자들은 10선 의지를 노욕(老慾)으로 판정했지만 우리 헌정사에10선 의원을 하나쯤 두는 것도 골동품적인 가치는 인정될 만한 것이었다. 기대되는 JP의 회고록 대통령 탄핵사태를 거치면서 내각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시점에서은퇴하는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 대통령 탄핵으로 인한 국가적 혼란과 비 용보다는 내각제 아래서 총리를 바꾸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는 입버릇처럼 “내각제의 씨라도 뿌리고 싶다”고 했다는데 거기에 가장 적합한 작업은 회고록 집필이 아닐까 한다. 자 화자찬만 있지 회고록다운 회고록이 없는 것이 우리의 정치현실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그가 자신의 허물까지를 진솔하게 기록함으로써 동시대인에게 추억으로,후대에는 교훈으로 남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가 이번 총선 결과를 그 일을 하라는 섭리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논설실장 imjk@sed.co.kr <저작권자ⓒ 한국i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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