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감격과 아쉬움 너머 신사년이 저문다

저마다 커다란 꿈과 희망을 안고 시작했던 신사년 한해도 벌써 저물었다. 경기 침체속에서도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기도 힘든 일을 해낸 이들이 있는가 하면 가슴속에 간직했던 소망들을 이런 저런 사정으로 성취하지 못하고 아쉬움속에 세모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8,000㎙ 이상의 봉우리 14개를 모두 등정한 산악인 박영석(39)씨와 북녘에 두고 온 아들을 만나기 직전 이산가족상봉이 보류되는 바람에 내년을 기약해야 하는 권지은(87) 할머니를 통해 신사년의 의미를 정리해 본다. ▦아시아 최초 14좌 완등 산악인 박영석씨“이젠 7대륙ㆍ3극점, 도전은 계속된다” “14좌를 모두 밟았다는 것은 정말 꿈 같은 일입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여기에 머무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내년부터는 7대륙 최고봉과 3극점 등정에 도전할 것입니다.” 지난 7월22일 세계 2위봉인 K2봉(8,611㎙) 정상을 밟음으로써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8,000㎙급 14좌를 모두 오른 산악인 박영석(골드윈코리아 기술자문ㆍ동국대산악회 OB)씨에게 올 한해의 의미는 남다르다. 그는 지난 91년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 정상에 오른 이후 10년만에 14좌 완등이라는 큰 이정표 세웠다. 이는 신체 조건이 좋은 미국ㆍ러시아 등 서구인들도 하기 힘든 기록으로 세계에서 8번째다. 하지만 깊이 쌓인 눈을 헤치고 13시간의 사투끝에 K2봉 정상에 선 박씨에게는 ‘해냈다’는 기쁨보다는 말못할 서러움과 아픔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그가 그전 13개의 봉우리를 밟는 동안 등반사고로 목숨을 잃은 6명의 동료들이 생각났던 것이다. 박씨는 그 곳에 6명의 위패를 묻었다. K2를 하산할 때 또 한명의 대원을 잃어 희생자는 모두 7명으로 늘어났다. 박씨는 사고를 당한 동료 산악인들이 미처 이루지 못한 꿈까지 이루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이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14개의 봉우리를 모두 오르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씨는 등반 이외의 일은 가급적 멀리하고 있다. 기업체 등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하고 있지만 동료들의 못다이룬 꿈을 실현할 때까지는 거절할 생각이다. 14좌 완등을 마무리한 박씨는 이제 7대륙 최고봉과 3극점 도전이라는 지구상 그 어느 누구도 달성한 적이 없는 원대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 가운데 그가 아직 밟지 않은 곳은 아콩카구아봉(남미)과 엘부르스(유럽), 빈슨 메시프(남극), 그리고 남ㆍ북극점 뿐이다. 박씨는 새해에는 1월2일 남미 최고봉인 아콩카구아 등정에 나서는 것을 시작으로 3월에는 북극점, 11월에는 남극점에 도전할 계획이다. 지난 27일 장애아시설을 방문했을 때 아이들이 자신을 알아보는 것을 보고 가슴 뭉클함을 느꼈다는 박씨는 “비록 우리의 경제상황이 어렵지만 목숨을 걸고 산을 오르는 산악인들을 보고 청소년을 비롯한 국민들이 꿈과 도전의식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오철수기자 csoh@sed.co.kr ▦이산가족 상봉보류에 애타는 권지은 할머니“새해엔 北아들 볼수 있을지…” “6살난 아들 병립이의 얼굴이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눈앞에 선합니다. 새해에는 아들을 보러 갈 수 있을른지….” 권지은(87ㆍ동대문구 답십리5동) 할머니는 요즘 북녘땅에 두고 온 셋째 아들 생각에 가슴앓이를 하며 세모를 보내고 있다. 이산가족상봉을 불과 나흘 앞두고 있던 지난 10월12일 9ㆍ11테러에 따른 우리 군의 경계조치를 빌미삼아 북한이 일방적으로 상봉 보류를 선언하는 바람에 권 할머니는 50여년만에 아들을 만난다는 꿈의 실현을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평안남도 강서군 누차면에서 대대로 농사를 짓고 살던 권 할머니 가족은 지난 47년 북한에서 사상문제가 심화하자 남쪽으로 갈 것을 결심했다. 그 해 5월 남편이 먼저 서울로 가자 권 할머니는 11월에 생후 6개월된 딸(이명옥ㆍ54)을 업은 채 큰 아들(병록ㆍ67)과 둘째 아들(병조ㆍ64)의 손을 잡고 다급한 마음에 남으로 향했다. 당시에도 통제가 심해 안내인을 사서 밤에만 38선 넘던 시절이기 때문에 식구들을 모두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셋째 아들(병립ㆍ61)은 다음에 데리러 오기로 하고 시댁에 맡겨두고 우선 길을 나섰다. 하지만 이것이 이별의 순간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 후 한반도에서 좌우익의 대립이 심해지면서 38선 넘기가 어려워지자 권씨 가족은 다시는 북으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한국전쟁이 나고 국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할 때 한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권씨 가족은 곧 통일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권 할머니는 이때 북녘에 두고 온 아들을 찾아보지 못한 것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6ㆍ15 남북공동선언이후 3차례의 이산가족상봉 때 대상자에 선정되지 않았던 권 할머니는 4차에서 상봉단에 포함되자 54년만에 만날 아들을 위해 내의와 의약품, 금반지 등 선물을 준비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상봉의 그 날을 손꼽아 왔다. “아들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다”며 애써 태연한 기색을 하는 권 할머니는 요즘 내심 조바심이 난다. 건강과 나이를 생각하면 마냥 기다릴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아들 병조씨는 “어머니께서 잠시 잊고 있다가도 북녘에 있는 동생 얘기만 나오면 며칠씩 가슴앓이를 한다”며 “새해에는 모자상봉이 꼭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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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철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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