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한국건설 60년] <1> 해방에서 한강의 기적까지

'전쟁 폐허' 복구하고 '세계'를 개척하다<br>1947년 '조선토건협회' 창립… 대한민국 재건 나서<br>60년대 도로 건설등 본격 국토개발·해외시장 진출<br>와우아파트·성수대교 붕괴등 '개발 집착' 대가 아픔도







[한국건설 60년] 해방에서 한강의 기적까지 '전쟁 폐허' 복구하고 '세계'를 개척하다1947년 '조선토건협회' 창립… 대한민국 재건 나서60년대 도로 건설등 본격 국토개발·해외시장 진출와우아파트·성수대교 붕괴등 '개발 집착' 대가 아픔도 최석영 기자 sychoi@sed.co.kr 관련기사 • 해방에서 한강의 기적까지 • [한국건설 60년] 故정주영 명예회장 우리나라 근대 건설산업의 효시인 조선토건협회가 창립한 지 올해로 60주년을 맞았다. 한국 건설산업이 60주년을 맞은 셈이다. 그 동안 우리의 건설업계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에 도로를 닦고 다리를 만들고 산업시설을 지어 국가 경제에 크게 이바지했다. 지난해 기준 국내총생산(GDP)의 15.5%와 고용의 7.9%를 건설이 차지한 점만 봐도 이를 잘 증명한다. 그러나 건설업계는 우리 사회에서 일한 만큼 평가를 받지 못하고 불합리와 불투명, 무책임의 대명사로 인식되는 측면도 있어 건설을 사랑하는 국민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이에 본지는 건설산업 성장과정의 회고와 함께 현재의 상황을 진단해보고 앞으로 맞이할 미래의 모습을 기획시리즈로 조망하고자 한다. 시리즈는 총 3부작 15회로 1부에서는 건설산업 60년의 과거를 현장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생생한 증언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2부에서는 세계를 누비며 우리의 위상을 높인 기업과 인물을 소개할 예정이다. 3부에서는 1ㆍ2부의 내용을 토대로 향후 건설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한국 건설업의 역사는 크게 5개의 시기로 나눠볼 수 있다. 각 시기의 명칭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보편적으로 지난 1945~58년은 ‘여명기’, 59~62년은 ‘정비기’, 63~73년은 ‘도약기’, 74~88년은 성장기, 88년 이후는 ‘성숙기’라고 보고 있다. 건설업계는 각 시기별로 국토개발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달려왔다. 물론 70년대 와우아파트 붕괴, 90년대 삼풍백화점ㆍ성수대교 붕괴라는 아픔도 겪었지만 이는 건설기술을 발전시키고 제도를 정비하는 기회로 작용하기도 했다. ◇근대 건설산업의 태동=1947년은 건설업계에 있어 가장 의미 있는 해이다. 우리나라 건설산업의 효시인 ‘조선토건협회’의 사단법인 등록으로 업계가 뜻과 힘을 모아 대한민국의 재건에 나선 시기이기 때문이다. 실제 산업화의 역사가 일천한 우리나라에서 60년이라는 긴 역사를 통해 경제의 비약적 성장에 일익을 담당해온 산업은 건설이 유일하다. 당시 협회를 창립했던 인물들은 지금 대부분 고인이 되어 증언을 들을 수 없지만 대한건설협회의 역사나 업체들의 사사(社史)를 보면 ‘하루라도 빨리 자주성 있는 단체를 만들어보자’는 민족성 분발심이 고조돼 해방된 지 40일이 지난 1945년 10월 창립총회를 하고 2년 만에 법인 등록을 마쳤다고 기록돼 있다. 협회사무실은 서울 중구 소공동 111-1번지에 소재한 4층 건물이었으며 초대 회장은 김세연씨였다. 이후 조선토건협회는 대한토건협회ㆍ한국건설협회ㆍ대한건설업회로 이름을 바꿨으며 현재의 대한건설협회가 그 맥을 이으면서 건설업계를 대표하고 있다. ◇전쟁 폐허를 복구하다=해방에서 50년대까지 6ㆍ25 동란 등 격변기를 거친 우리나라가 본격적인 국토개발을 시작한 때는 60년대다. 이때 1ㆍ2차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되며 한국경제사의 일대 전환기를 맞은 것이다. 건설업계는 치수(治水)사업과 전국 주요 도로의 포장사업, 항만, 상ㆍ하수도, 주택건설 등을 활발하게 진행하게 된다. 특히 68년 12월에는 우리나라의 첫 고속도로인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됐고 70년 경부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전국이 1일 생활권으로 바뀌게 됐다. 당시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에는 군대까지 파견돼 세계의 건설 역사상 유례없이 290일 만에 공사를 마치게 된다. 현대건설의 사사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6ㆍ25 동란 이후 전후복구 공사를 주도하면서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사회간접자본 시설이 확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회장은 68년 12월 각계의 반대 속에서 단군 이래 최대 토목공사인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시작했으며 박정희 대통령도 공사현장을 수시로 방문해 한국경제 발전의 초석을 다질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현장 직원들에게 국가적 사명감을 심어주며 일을 진행했다. 드디어 69년 9월11일 착공한 지 290일 만인 70년 7월에 경부고속도로 428㎞가 개통됐다. 정 회장과 국민들의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의지가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이다.” 이후 국토공간의 효과적인 이용을 위해 1차 국토종합개발계획(72~81년)에 의한 전국 고속도로망과 지하철노선의 골격이 마련됐으며 4대강 유역의 다목적댐 건설사업도 의욕적으로 추진됐다. 74년 8월 서울역~청량리역 7.8㎞ 구간의 서울지하철 1호선이 개통됐으며 73년 10월에는 국내 최대 높이와 저수량을 자랑하는 소양강댐도 완공됐다. ◇아픔과 영광의 순간들=건업업계는 70년대를 혹독한 시련으로 시작했다. 70년 4월8일 오전6시30분 서울 마포구 창전동 산2번지에서 시민아파트인 와우아파트가 그대로 무너진 것이다. 이 아파트는 30가구의 5층 건물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33명이 사망하고 40명이 중경상을 입는 참화가 빚어졌다.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은 당시 개발 드라이브를 걸던 정권에 큰 타격을 줬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고 건설업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후 95년과 96년에 잇따라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가 붕괴돼 더욱 많은 인명피해를 내면서 개발에만 집착하던 건설업계는 자성의 목소리와 함께 안전에 대한 중요성도 느끼게 됐다. 또 97년에 닥친 IMF사태는 국내 건설업의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리게 만들었다. 이 여파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현대건설과 대우건설이 부도사태를 맞았으며 숱한 중견기업들이 문을 닫아야만 했다. 부도사태 이후 채권단 관리하에서 현대건설의 사장을 맡았던 이지송 전 사장은 “현대건설이라는 회사를 지키기 위해 직원들이 온몸을 바쳤으며 월급이 절반으로 깎이고 일감이 늘었어도 불평하는 직원들은 한명도 없었다”며 당시 어려운 상황을 회고했다. 영광의 순간도 많았다. 88올림픽을 유치하면서 건설업도 비약의 발전 계기를 마련한 것. 잠실주경기장을 비롯해 선수촌아파트와 주변지역을 대대적으로 개발하며 건설이 활기를 띠었고 서울의 각종 인프라를 확충하는 공사로 건설업체들은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또 88년부터 시작된 주택 200만가구 건설과 5개 신도시 개발사업은 우리나라 주택문화를 일시에 바꿔버리는 전환점이 됐다. 주택공급 규모를 최대한 늘려 당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던 주택난을 일시에 해결한 것은 물론 아파트 문화가 정착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인천국제공항과 서해안고속도로, 전국 10개 월드컵경기장 건설, 경부고속철도, 청계천 복원 등 굵직한 사회간접자본(SOC)사업 등이 완공되며 현재의 대한민국을 이루고 있다. ◇세계를 개척한 한국건설=국내에서도 굵직굵직한 공사가 많았지만 우리의 건설업체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축적된 기술과 노하우를 갖지 못한 척박한 상황에서도 도전과 개척정신으로 무장한 우리 업체들은 세계 건설시장을 노크한다. 드디어 65년 현대건설은 태국에서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 해외건설의 닻을 올리게 된다. 이후 69년에는 현대건설이 미국 알래스카 도로국이 발주한 허리케인 걸취교량 공사를 121만7,000달러에 수주하기도 했다. 이 공사는 한국건설업이 독자적으로 수주한 최초의 해외공사라는 의미를 지닌다. 해외건설이 절정을 이룬 시기는 2차 오일쇼크로 중동 지역의 건설시장이 급속하게 팽창하기 시작한 73년부터다. 베트남전 종전으로 새로운 시장 개척을 도모하던 우리 업체들은 73년 삼환기업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암울라~카이바 고속도로를 계약해 중동 진출을 알렸다. 업체들이 그 동안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 시장에서 경험과 기술을 축적하고 인력과 장비를 확보한 상태에서 중동시장 개척에 나서자 해외건설업은 급속한 성장을 이루게 됐다. 이런 해외진출의 성공은 오일쇼크로 인한 석유가격의 폭등으로 국내의 경기침체와 성장둔화, 국제수지 악화라는 어려운 여건에서 이룬 것이어서 더욱 의미가 있었다. 건설업의 해외 선전으로 79년 이란혁명으로 국제 원유가격이 24달러까지 폭등했지만 우리나라는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굵직한 공사만 추려봐도 대림산업이 쿠웨이트에서 정유공장 기계정비공사를 46만달러에 수주했으며 신원개발이 이란 코람샤항 확장공사를 4,076만6,000달러에, 현대건설이 바레인 조선소공사를 1억6,000만달러에 수주했다. 특히 76년에는 75년부터 시작된 정부의 제도 지원으로 급속하게 수주액이 증가했는데 특히 현대건설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산업항 건설공사를 9억3,100만달러에 수주해 고액 수주의 큰 전기를 맞이 했다. 이 같은 해외건설의 개척으로 지난해 우리 업체들의 해외건설 수주액은 165억달러를 기록해 사상최대 기록을 갈아치웠으며 올해는 상반기만도 100억달러를 넘어 연 200억달러라는 대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다. ◇시리즈 순서◇ 無에서 有를 창조한 한국건설 ①해방에서 한강의 기적까지 ②한반도 지도를 바꾼 국토개발 5개년계획 ③사막에서 꽃피운 한국건설 ④주택 200만호 건설, 꿈이 현실로 ⑤첨단기술에 도전하다 ⑥국가경제의 기둥 건설산업 세계를 놀라게 한 반만년 장인정신 한국건설 새 도약을 위해 입력시간 : 2007/06/17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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