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데스크 칼럼] '국산 술' 진로의 향방

연성주<생활산업부장>

소주가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말이다. 원나라에서 수입된 소주는 다른 술보다 빚는데 곡식이 많이 들어가고 제조 방법도 까다로워 일부 상류층만 즐길 수 있는 귀한 술로 대접받았다. 고급주이던 소주는 일제 때 대량 생산의 길이 열리면서 대중화됐다. 소주는 지난 60~70년대 막걸리와 80~90년대 맥주를 제치고 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술로 자리매김했다. 때로는 생활고에 지친 서민들의 마음을 달래는 애환의 상징으로, 때로는 시국을 논하는 자리에서 저항의 상징으로 주당들의 친숙한 벗이 돼왔다. 아직까지도 주량을 물을 때는 으레 소주 몇 병 마시느냐가 잣대가 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 국민들이 얼마나 소주를 아끼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새해가 되면서 진로소주의 주인 찾아주기 작업이 활기를 띠고 있다. 매각주간사인 메릴린치가 다음주 중 입찰공고를 내면 상반기 중에는 임자가 결정될 전망이다. 현재 진로 인수를 희망하는 기업만도 국내외 10여개가 넘는다고 한다.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진로 인수에 눈독을 들이는 이유는 진로만 품에 안으면 단숨에 주류업계의 왕자로 등극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97년 부도 이후 어려움을 겪었던 진로는 법정관리를 거치면서 부실을 말끔히 씻어내고 우량기업으로 탈바꿈했다. 내수부진 속에서도 지난해 사상 최대의 실적을 올렸으며 앞으로도 몇 년간은 탄탄대로가 예상된다. 진로소주는 아직까지도 도매상들이 선금을 줘야 물건을 만질 수 있는 몇 개 안되는 품목으로 알려져 있다. 진로가 부도 이후 매출이 오히려 늘어나자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한국 국민들 사이에 진로가 해외자본에 헐값에 팔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소주를 마실 때 진로를 선택하고 있다”고 보도한 것을 보면 외국에서도 우리 국민의 진로 사랑을 부러워할 정도다. 진로 매각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과연 우리가 진로를 외국기업에 꼭 팔아야 하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은 외환위기 때와 같이 달러가 시급히 필요한 시점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국내 제조업을 보호할 필요성이 더 크다. 게다가 국내기업은 독과점 규제라는 족쇄에 발목이 잡혀 있는 반면 외국계는 별다른 제한이 없어 상대적으로 유리해서 역차별 소지가 다분히 있다. 만일 진로마저 외국기업에 넘어가면 외국계가 국내 주류시장을 완전히 평정하게 된다. 양주와 맥주시장의 절반 이상을 외국인이 장악한 상황에서 진로까지 넘겨주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술은 없어지게 되는 셈이다. 맥주의 경우 오비맥주는 벨기에의 인터브루라는 회사가 주인이고 이 회사는 2년 전 카스맥주까지 인수했다. 위스키는 디아지오코리아ㆍ진로발렌타인스 등 외국계 회사가 국내시장의 80%를 장악하고 있다. 물론 국내기업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감나무 아래서 감이 떨어질 때만을 기다려서는 안된다. 진로를 원하는 기업들은 자신들의 인수 당위성을 적극 홍보해야 한다. 무조건 외국자본은 안된다는 국수주의적 주장은 글로벌시대에 통하지 않는다.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주류업종의 속성이나 경영노하우 등을 감안할 때 국내기업이 진로를 인수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논리를 적극 개발해야 한다. 또 자금이 부족하면 국내기업끼리 컨소시엄을 만들어 공동으로 인수하는 방식도 고려해야 한다. 그동안 국내 금융기관과 빌딩들을 사냥해 짭짤하게 이익을 챙긴 외국계 펀드들이 이제는 산업자본까지 넘보고 있는 상황이다. 수조원의 이익을 내고도 세금 한푼 안내는 외국계 투기자본에 국내 알짜기업을 더 이상 넘겨서는 안된다. 우리의 소주는 멕시코의 데킬라나 러시아의 보드카에 못지않은 좋은 술이라고 외국의 전문가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국민의 술인 소주를 외국기업에 넘겨주면 우리의 자존심을 잃는 격이다. 가뜩이나 외국자본이 한국경제를 쥐고 흔드는 판에 서민들이 매일 마시는 소주의 주인까지 외국인이라면 소주 맛이 제대로 날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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