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가 서서히 회복조짐을 보이면서 월가 발 금융위기의 기억도 사라지는 듯하다. 각 국 중앙은행들은 잇달아 자산매입 중단조치를 취하고 있고 언론들도 이제 최악의 위기는 끝났다며 기준금리 인상 등의 출구전략 시행이 임박했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러나 아직 끝을 헤아리기에는 이른 감이 있다. 곳곳에서 '더블딥(Double Dip)'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아니면 회복기가 여느 위기 때보다 길어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국의 금융당국이 가고 있는 행보가 자못 궁금해진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전 의장이었던 앨런 그린스펀은 지난 주말"파산하기에는 너무 크다(too big to fail)고 여겨지는 대형 금융회사들은 분할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대형은행들은 항상 정부가 망하지 않도록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금융기관 간 경쟁이 사라지고 금융 시스템에 위험이 초래된다"면서 미국의 석유재벌 록펠러가 세운 스탠더드 오일의 분리(1911년)를 예로 들었다.
그러나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국은 IMF 외환위기 이후 거꾸로 된 길을 걸어왔다. 국제 경쟁력을 키운다는 명분으로 많은 중소은행과 지방은행을 통폐합해 대형은행의'몸집 불리기'의 제물로 삼았다.
지난해 금융위기로 수많은 금융사들이 파산했지만 미국에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5,000여개의 중소 및 지방 은행들이 산재해 있다는 것은 금융 부문에서 독점만이 능사가 아님을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금산분리를 완화해 산업자본의 은행소유를 개방한 한국과는 달리 대형은행들에 대한 구제금융으로 사실상 이들을 국유화하고 있는 미국 정부의 조치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올해 초부터 시행 중인 자본시장통합법도 금융위기의 주범이었던 월가의 대형 투자은행들을 모델로 한다는 점에서 우려를 자아낸다. 이로 인해 곧 금융회사 간 칸막이가 사라지고 월가의 첨단 금융공학을 사용한 복잡한 파생상품은 물론 대규모 사설 투자펀드가 등장해 금융시장에 일대 파란을 불러올 것이 뻔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가 중앙은행의 거시 감독권을 강화하고 장외 파생상품 거래를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여 투명성을 높이고자 하는 금융개혁법안을 추진하고 있는 것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 세계 자본주의체제의 중심인 미국과 반대로 가는 우리 금융권의 행보가 앞으로 닥쳐올 새로운 금융위기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벌써부터 불안감을 지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