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데스크 칼럼] 정운찬에 대한 변명

"정운찬씨의 초과이익 공유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근 기자가 가장 많이 하고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의 하나다. 기자는 그에 대해 일면식도 없다. 먼발치에서조차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다. 이렇게 먼저 밝히는 것은 혹시 모를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다. 정운찬. 우리나라 최고 대학의 총장 출신이며 총리를 지낸 당대 손꼽히는 지성인이다. 하지만 최근 2~3년 새 그처럼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이름을 먹칠 당한 이도 드물다. (신정아씨의 책 때문에 가십 대상이 된 것은 말 그대로 사사로운 일이어서 논란의 대상에서 제외한다) 포퓰리즘 휩싸인 이익 공유제 그가 우리 사회에 느닷없이 던진 초과이익 공유제 논란. 자본주의 정책이냐, 사회주의 정책이냐며 색깔논쟁까지 불러온 이 개념을 놓고 재계는 물론 정부 부처와 정치권 모두가 '이제 그만하시라'고 권한다. 초과이익을 공유하자는 그의 주장은 자본주의 또는 시장 매커니즘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인식될 정도다. 다른 차원에서는 경제학자 정운찬이 시장원리를 모르지 않을 터이니 분명 정치적 계산이 깔린 승부수일 것이라고 비딱하게 바라보는 사람들도 많다. 최근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가 다시 열렸다. 나라의 부가 늘고 있다는 소식이 반갑지만 희한하게도 서민들의 삶이 그만큼 여유로워졌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소득 양극화다. 상위계층 소득은 가파르게 올라갔지만 중ㆍ하위 계층 소득은 여전히 제자리 걸음이거나 퇴보하고 있다. 국세청이 작년 말에 발표한 '2009년 국세통계 연보'에 따르면 전체 근로소득자의 37.8%인 541만명이 매월 100만원도 채 안 되는 급료를 받고 있다. 같은 통계에서는 연봉 1억원 이상 고소득 근로자들이 20만명에 육박했다. 한계생활의 임계치가 얼마인지 규정할 수 없다지만 월급 100만원 이하 봉급생활자가 2011년 한국에서 살아가기는 너무 빡빡하다. 소득 양극화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에만 국한되지 않고 있다. 이웃나라 일본은 계층 간 소득격차와 이에 부산 되는 사회문제를 놓고 스스로 '미끄럼틀 사회'라고 진단한다. 월급을 받고 있을 때까지는 일정 수준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지만 퇴직 또는 실직과 동시에 마치 미끄럼틀에서 미끄러지듯 극빈층으로 내몰리는 구조에 대한 자기 비판적 표현이다. 미국에서도 최근 중산층 몰락에 대한 경고와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상당수 미국민이 반대하고 있는 의료보험 개혁을 오바마 정부가 밀어붙인 이면에는 사회보장이라는 안전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채 진행될 중산층 몰락의 사회적 불안정성을 다분히 염두에 둔 것으로도 이해된다. 주제로 돌아가보자. 정운찬이 우리 사회에 불쑥 내민 초과이익 공유제라는 화두는 진정 포퓰리즘적이고 반 시장적이기만 한가. 깊어지는 양극화도 고민할 때 인정하고 싶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는 지금 '앞으로도 고도성장의 뜀박질 속에 파이를 키워가야 하는지'아니면 '계층 간 마찰을 줄여 더불어 사는 방법을 착근시켜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할 정도로 양극화의 병이 깊어져 있다. 이 병이 지금보다 좀 더 깊숙하게 진행된다면 과연 우리사회는 끝없는 소모전과 막대한 비용을 치러야 할 계층 간 마찰과 충돌을 피해갈 수 있을까. '탐욕을 포기하라'는 그의 주장은 그 자체로는 반시장적이다. 하지만 시장시스템을 건강하게 유지, 관리하기 위해 지금이라도 과감하게 '비만을 줄이도록 하라'는 경고로 받아들인다면 역설적으로 매우 시장친화적이다. 우리는 지금 손가락만 바라보다 달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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