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월 일주일 간의 지방출장 기간을 통해 용기를 얻어 서울로 돌아온 나는 그 다음날부터 용지를 구입해 인쇄소에 넣고 책을 다시 찍기 시작했다. 2쇄가 돌아가고 있는 동안 서울시내 서점을 돌며 재고파악을 하고 몇 군데 대학으로 가서 입학원서를 구입해 부탁 받은 지방서점으로 보내 주었다.
지금이야 교통이 발달해 전국이 일일 생활권 안에 있지만 당시만해도 서울과 지방을 잇는 교통편은 매우 불편했다. 고속버스나 열차가 정차하는 큰 도시를 제외하면 웬만한 지방에서 서울 길은 꼬박 하룻길이 넘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시험 치러 온 후 며칠 묵는 것 외에도 입학원서를 사러 와서 이틀, 접수하러 와서 이틀은 묵어야 했다. 따라서 서울에 특별한 연고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큰 부담을 줬다. 그러다 보니 아는 사람이 서울에 있으면 원서 구입이나 접수 등을 맡기는 일은 보통이었다.
지방 출장길에 몇몇 서점주들이 자녀 원서문제로 걱정하기에 나는 기꺼이 그 일을 대신해 주기로 한 것이다. 원서를 사서 보내 준 후 다시 받아 접수시켜 주는 일은 지방 출장을 다니던 몇 년 동안 계속됐다.
1월에 2쇄에 들어갔던 책을 4월에 3쇄를 찍는 등 매출이 순조로웠기에 망정이지 당시 나는 큰 위기를 맞을 뻔했다. 석유파동으로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뛰었고 경제계 전반의 흐름에도 심각한 `동맥경화`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다른 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본이 탄탄하지 못한 출판계의 사정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1월 2쇄 때 연당 1만7,000 원에 구입했던 그림책용 마닐라지가 3쇄를 찍던 4월에는 2만3,100원으로 인상됐으며 원색 분해 비용도 두 배나 뛰었다. 제판비ㆍ인쇄비ㆍ제본비 등 제작비 전체가 매월 오르다시피 했기 때문에 책값도 새로 찍을 때마다 인상하지 않을 수 없는 악순환이 거듭됐다.
처음에는 300원이던 그림책이 1월에는 350원, 4월에는 400원, 7월에는 450원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출판사 입장에서 먼저 찍은 책을 팔아도 그대로 다시 찍을 비용을 충당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자재비가 껑충껑충 뛰었다.
그러나 사회 전반에 걸친 불황 속에서도 9월에 4쇄를 돌렸고 12월에는 신간 두 권과 초간본 5쇄를 찍었다. 책 종수가 많지 않았는데도 영업이 순조롭게 된 데에는 책의 호응도도 좋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서점에서 주문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는 영업방법을 터득하고 적용한 것이 큰 힘이 됐다. 사무실은 물론 전화도 없이 시작해 제본소 전화번호를 임시 연락처로 삼고 있긴 했지만, 제때 나에게 연락이 닿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당시 나는 기획에서 제작, 영업까지 혼자 이끌어 나가야 하다 보니 1인 5역을 해도 모자랄 만큼 바쁘게 뛰어다녀야 했고, 제본소도 전화만 받는 직원을 따로 두지 않아 나에게 온 전화를 제대로 메모했다가 전해 주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서점에 가면 주문한 책을 왜 주지 않느냐는 말을 듣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손님이 책을 찾는데 책이 없어 못 팔고 주문을 해도 갖다 주지 않으니 이렇게 영업을 해서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때 내가 깨달은 것은 `서점에서 주문을 하면 이미 때가 늦었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서점에 가면 먼저 재고 파악부터 한 후 다 팔리기 전에 항상 일정 부수를 보유할 수 있도록 미리 알아서 책을 보급했다. 이런 영업방법은 서점의 반응도 좋게 할 뿐만 아니라 판매도 늘게 하는 이중효과까지 있어 그때 이후 지금까지 예림당 영업의 기본이 되고 있다.
<아시아태평양출판문화협회장ㆍ예림 경기식물원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