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동십자각] 믿음이 커질 때

얼마 전 서울시 기피시설 이전을 요구하는 고양시민 서명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적이 있다. 안주인이 반장인데 통장으로부터 우리 반 서명을 모두 받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안주인의 지시로 모두 49가구의 초인종을 울리던 중 한집에 들렀을 때다. "이거 서명해야 되는 건가요. 정답이 뭔가요"라며 아주머니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씩 웃더니 이내 서명을 했다. 이 아주머니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피시설을 옮겨가라는 내용이라는 말 한마디에 주저 없이 서명을 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그런 일을 한 나부터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서울시 기피시설이 고양시 어디에 있는지, 거기에 있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혹은 그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등을 판단하기 위한 최소한의 근거도 없이 서명을 했다. 생각해보면 이런 자세는 요즘 우리가 세상을 사는 모습이다. 판단이 필요한 사안은 점점 복잡해지고 우리는 그럴수록 쉽게 인식의 한계에 이른다. 그 지점에서 우리는 판단을 위한 더 이상의 노력을 포기하고 믿음에 몸을 맡긴다. 기피시설 이전요구는 바로 판단하기 어려운 정도의 복잡성이 있는 사안이다. 판단의 근거를 찾는 작업은 시간이 걸리고 우리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다. 그 순간 우리는 기피시설이 주위에 없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믿음에 의지해 판단을 끝낸다. '지금, 경계선에서'라는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판단하기 어려운 사안에 맞닥뜨릴 때 보이는 특징으로 오래된 믿음에 의지하는 것, 불합리한 반대를 하는 것, 책임을 개인화하는 것 등을 꼽는다. 최근 수쿠크법 도입을 놓고 일부 기독교인들이 보인 행태는 그런 면에서 전형적이다. 수쿠크법 자체에 대한 논의보다는 '이슬람은 테러집단'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으로 법 도입에 불합리한 반대를 하고 책임을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에게 돌렸다. 저자는 지식습득 능력이 감퇴하는 만큼 믿음에 대한 취약성이 높아진다고 주장한다. 지식이 성장을 멈추고 근거 없는 믿음이 커질 때 잘못된 판단을 내릴 개연성은 매우 높다. 또다시 불거진 남북긴장과 우려되는 구제역 침출수, 끝없이 오르는 유가 등 현명하게 대처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다. 해결의 첫 단계는 달콤한 믿음의 미몽에서 깨어나 쓰지만 몸에 좋은 지식으로 무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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