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 국토개발의 선구자 다산(茶山)

참여정부의 역점사업 중 하나가 행정도시(세종) 건설, 혁신ㆍ업도시 건설 등 국가균형발전정책이다. 최근 이러한 사업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2단계 균형발전정책이 발표되기도 했다. 우리는 무려 931회에 이르는 침략으로 도로건설 등 국토개발에 소극적이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국토개발에 관해 선각자적인 혜안을 가졌던 이들의 대표적인 분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이다. 산은 ‘경세유표’에서 조세행정ㆍ행정기구 개편 등에 관한 개선책을 제시했는데 이 가운데서 국토정책이나 도시계획에 관한 진언도 상당히 눈에 띈다. 다산의 식견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 사례가 한강에 설치된 배다리와 화성 축조이다. 특히 화성은 도성을 빼고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계획도시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화성성역(華城城役)’이라 부른 이 대역사는 1794년 2월부터 1796년 9월까지 이뤄졌고 성의 총연장은 5,743m이다. 화성이 우리 도시건설사에서 특기할 만한 사항은 세 가지이다. 첫째, 정조는 200명의 학자에게 축성을 위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오늘날로 치면 공모제도이다. 다양한 아이디어를 검토한 정조는 정약용의 아이디어를 채택해 그에게 축성의 대임을 맡긴다. 이러한 공모를 통한 개방적 의사결정의 정신은 행정도시 건설에도 도입돼 도시개념 공모, 중심행정타운ㆍ첫마을 계획 수립 등에 국제공모가 실시됐다. 또 한 가지는 최초로 벽돌과 ‘거중기’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전까지는 돌로 성을 쌓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화성은 69만5,000장이나 되는 벽돌을 구워 성벽을 쌓아나갔다. 거중기는 움직도르래를 사용해 정약용이 직접 설계한 것으로 7.2톤의 무게를 들 수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눈여겨볼 만한 점은 공사과정에 실명제를 도입했다는 것이다. 1801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ㆍ제도ㆍ재료 가공법 등을 비롯, 참여자의 인적사항 및 노임까지 기재돼 있다. 실명제는 개개인에게 책임감과 자부심을 갖게 해 공사품질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아쉽게도 오늘의 우리 도시건축문화는 다산의 전통을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있다. 행정도시ㆍ혁신도시 등을 통해, 신기술ㆍ신자재ㆍ신공법을 활용하고 공사과정을 빠짐없이 정리해 후세에 남긴 다산의 전통을 살려 우리 도시건축문화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수 있도록 모두가 노력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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