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신국채보상운동/문희갑 대구광역시장(로터리)

「꿈인가 생신가, 하늘이 준 소식인가. 이 소식이 어디서 왔소. 삼백번을 뛰며 삼백번을 춤추며 이 만고의 호소식을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봉헌하노니….」 황성신문은 1907년 2월 대구에서 발원한 국채보상운동의 소식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을사조약 체결 이후 일본은 침략정책을 더욱 노골화하여 한국에 적극적으로 차관을 제공했다. 이는 한국의 경제독립을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공작이었다. 식민지화를 위한 정지작업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구 서문시장의 거상이었던 서상돈선생 등 대구민의소회장단 16명이 담배를 끊어서 국채를 갚아나가자는 운동을 처음으로 제창했다. 이것이 국채보상운동의 시발이다. 이 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퍼졌다. 남자들은 담배를 끊고 여자들은 쌀을 모았다. 금비녀, 옥가락지를 아낌없이 바쳤다. 위로는 고종이 담배를 끊었고 아래로는 여섯살 어린이가 세뱃돈을 가지고 왔다는 기록도 있다. 일진회를 앞세운 통감부의 방해공작도 극렬해졌다.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선생을 의연금 횡령혐의로 구속하고 나섰다. 불붙은 국채보상운동에 찬물을 뿌리기 위한 음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로서는 엄청난 액수인 2백30만원의 거금이 모였다. 일제의 극렬한 방해가 없었다면 국채 1천3백만원은 모으고도 남았을 것임이 분명하다. 최근들어 대구에서 이 운동이 다시 불붙었다. 대구상의를 중심으로 이 운동에 대한 재조명 논의가 일어나더니 이제 범시민적으로 호응을 받고 있다. 여약사들이 나섰고 은행원들이 나섰다. 시민단체, 여성단체들이 모두 나서 「대구사랑운동」과 연계하여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그 열기는 지역경제살리기 국민저축운동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전국 15개 시도 가운데 가장 먼저 목표계약고 2천억원을 달성했으며 현재까지 3천억원이 훨씬 넘는 계약고를 올렸다. 금세기초 국채보상운동의 발원지인 대구의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쾌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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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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