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1월1일] 리스본 대지진


1755년 11월1일 9시40분, 포르투갈 리스본. 대성당 바닥에서 울린 굉음이 성가대의 합창 소리를 덮었다. 잠시 건물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땅이 솟구쳤다. 세 차례 지진파가 도시를 파괴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3분. 마침 가톨릭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만성절이어서 교회에 모인 신도들의 피해가 가장 컸다. 무너진 교회를 간신히 빠져나와 도착한 ‘안전한 강가와 항구’에는 더 큰 재앙이 기다리고 있었다. 높이 10m가 넘는 거대한 해일, 쓰나미가 덮친 것. 바닷물이 쓸고 간 도시에는 곧 불길이 피어올라 강풍을 타고 사흘간 리스본을 태웠다. 사망자 추계는 최소 3만에서 최대 10만명. 살아남은 자도 ‘저주의 도시’를 황급히 떠났다. 현대기술로 추정한 당시 지진의 세기는 리히터 지진계로 진도 9 수준. 1556년 중국 산시성 지진(진도 10, 사망자 80만명)보다 피해 규모는 작았지만 역사에 미친 파장은 훨씬 컸다. 먼저 회의론이 일었다. 계몽주의자 볼테르는 ‘신에게 정의가 있고 신도들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이런 참극이 가능한가. 그토록 신앙심 두텁다는 리스본이 파리나 런던보다 죄가 많기 때문인가’라며 울었다. 교회도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응징’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못했다. 신도들의 분노 때문이다. 민란을 우려한 포르투갈 정부는 교회에 ‘응징론’을 피해달라는 주문을 넣었다. 결국 교회는 ‘재앙과 신의 섭리는 상관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연과학은 이렇게 신의 영역에서 벗어나 학문의 세계로 들어왔다. 당장 지질학이 생겼다. 17세기 중반부터 발명과 기술개발이 잇따르고 산업혁명이 순식간에 퍼진 것도 이런 토양에서다. 무고한 인명의 희생으로 종교 이데올로기가 종언을 맞은 자리에 과학기술이 꽃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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