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가’
1983년 2월. 도쿄.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은 이 같은 제목의 발표문을 통해 반도체 사업에 본격 진출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른바 ‘도쿄선언’이다. 세계 반도체 역사에 큰 획을 긋는 ‘대사건’이었다. 그러나 당시만해도 삼성의 이 같은 야심에 대한 선진국들의 반응은 ‘냉소’ 그 자체였다.
당시 우리 경제는 70년대의 두 차례 오일쇼크 이후 최악의 늪에서 간신히 벗어나던 시기였다. 79년 10ㆍ26사태에 이어 80년 5ㆍ18 광주 민주화항쟁이 잇따르는 등 정세도 불안했다. 이 같은 환경 속에서 막대한 초기 투자비용과 고도의 기술력을 요하는 반도체 산업에 진출하겠다는 선언은 ‘무모하다’는 평가를 받을 만도 했다.
하지만 삼성은 위기를 기회로 삼아 ‘반도체 대국’을 향한 힘찬 발걸음을 거침없이 내딛었고, 이후 세계 반도체 업계의 ‘냉소’가 ‘충격’으로 변하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실 삼성의 반도체 산업 역사는 도쿄선언을 하기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74년 12월6일 파산위기에 처한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것이 실질적인 출발점이다. 당시 삼성 계열사인 동양방송 이사였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천연자원이 없는 우리 국가나 기업이 앞으로 살아남을 길은 머리를 쓰는 하이테크 산업 밖에 없다”며 사재를 털어 부도직전의 회사를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시장과 기술의 흐름에 정통한 이 회장의 판단력이 빛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삼성전자는 75년 9월 손목시계용 반도체 제품을 개발한데 이어 ▦77년 흑백 TV용 트랜지스터(TR) ▦81년 컬러TV용 집적회로(IC) 개발에 성공하면서 반도체 기술의 기초를 닦기 시작했다. 따라서 도쿄선언은 반도체에 대한 시발점이 아니라 세계에 삼성반도체를 알리는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이후 비약적인 성장을 이어간다. 83년 11월 최첨단인 64K D램을 개발하는데 성공, 한국을 ‘세계 3번째 첨단 VLSI(초고밀도집적회로)급 반도체 기술 국가’로 진입시켰다. 삼성이 개발하는 제품에는 늘 ‘세계 최초’, ‘세계 최고속’, ‘세계 최대용량’ 등의 수식어가 따라 다녔다. 특히 94년에는 일본ㆍ미국에 앞서 256M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 사업진출 20년 만에 기술 측면에서도 세계적 리딩 기업으로 부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삼성은 이어 90년대 중반 이후에도 DDR, 램버스, DDR2, 그래픽 DDR2 등 차세대 고성능 D램을 잇따라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특히 디지털 스토리지 분야의 혁명으로 대표되는 플래시 메모리 분야에서는 지난 99년 256메가 낸드플래시를 시작으로 매년 2배씩 집적도를 늘린 제품을 출시해 왔으며, 올해 9월에는 세계 최초로 첨단 60나노 공정을 적용한 8기가 낸드플래시 메모리 제품 개발에 성공하면서 다시 한번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삼성전자는 올해까지 ▦D램(13년) ▦메모리(12년) ▦S램(10년) 등의 분야에서 10년 이상 세계시장 1위를 고수하며 장기집권(?) 체제를 굳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