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부양에 관한 한 남달리 단호한 정책안을 내놓고 있는 일본 자민당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과 원자력발전소 재가동이라는 두 민감한 이슈에 관해서는 명확한 방향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TPP와 원전 재가동 문제는 당내 여론은 물론 국론을 가르는 '뜨거운 감자'로 앞서 민주당 정권을 괴롭혀왔다. 아베 신조 자민당 총재는 표심을 얻기 위해 선거 기간 내내 두 사안에 대해서는 모호한 입장으로 일관해왔지만 지난 16일 총선을 거쳐 다음주 중 일본의 차기 총리로 등극하게 됨에 따라 더 이상 이 문제를 미뤄둘 수만은 없게 됐다.
특히 아베 정권에 부담이 되는 것은 TPP 교섭 참가 여부에 관한 입장 정리다. 자민당은 총선 공약에서 정통 지지층이었던 농촌의 민심을 인식해 '성역 없는 관세철폐를 전제로 하는 한 TPP 교섭 참여에는 반대한다'는 방침을 명시하면서도 "국익을 지킬 수 있다면 교섭한다"는 애매한 입장을 보여왔다. TPP는 미국 주도하에 11개국이 교섭에 참여하는 다자간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농업ㆍ금융 등 모든 분야에서의 예외 없는 관세 철폐를 요구한다.
앞서 민주당의 노다 요시히코 총리는 무역자유화에서 뒤처져 글로벌시장에서 밀려나고 있는 일본 기업들의 경쟁력 회복을 위해 TPP에 공을 들여왔다. 무역자유화 부진은 일본 기업들의 발목을 잡는 이른바 '6중고' 가운데 하나로 재계로부터의 TPP 참여 압력도 만만찮다. 17일 게이단렌은 자민당 압승을 환영하는 동시에 "TPP 교섭 참가는 한시도 유예하지 말고 조기 실현해달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자민당 입장은 복잡하다. 내년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둔 시점에 농산물 시장 개방을 초래할 TPP 교섭 참가 결정을 내린다면 농민 표의 대거 이탈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관료들 사이에서는 "아베 총재는 TPP에 긍정적인 입장이지만 내년 참의원 선거 이전까지는 입장을 정리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도 흘러나온다.
문제는 아베 총재가 국내 정치일정에 맞춰 이 문제를 마냥 미뤄둘 수 없다는 점이다. 미국 등 TPP 참가국 정상들은 내년 10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회의(APEC) 정상회담 일정에 맞춰 기본 합의를 도출하기로 의견을 모은 상태다. TPP의 기본 틀을 만드는 교섭 과정에서 일본이 배제된다면 일본 기업들은 글로벌 시장의 무한경쟁에서 더없이 불리한 여건에 처하게 된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교섭 참가를 위한 미국 의회 승인절차 등을 고려할 때 일본에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고 지적했다.
아베 정권을 더욱 난처하게 만드는 것은 TPP 교섭 참가 여부가 미ㆍ일 동맹를 강화하는 데 있어서도 핵심 변수라는 점이다. 미ㆍ일 동맹 강화는 자민당 정권 외교안보정책의 핵심 축이다. 대중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미국이 안보협력의 일환으로 일본의 TPP 참가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 참의원 선거까지 '시간 끌기'를 원하는 아베 정권에는 더없이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TPP에 비하면 원전 문제에는 다소 여유가 있다. 자민당은 기본적으로 '원전 제로'에 반대하면서도 사안의 중요성을 인식해 원전 재가동 여부를 3년 뒤에 결정하겠다며 입장 표명을 유보한 상태다. 하지만 탈원전을 내세운 민주당의 참패가 보여주듯 이미 일본에서는 원전 재가동이 불가피하다는 여론이 힘을 얻고 있다. 현지 언론들은 자민당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자민당 정권이 들어서면 민주당의 원전 정책이 전면 재검토되고 안전판정을 받은 일부 원전에 대해서는 가동이 허용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다만 연립정권을 꾸리게 될 공명당이 원전 '제로' 방침을 고수하고 있어 정책 조율 과정에서 원전 재가동 결정이 늦춰질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전력난에 따른 전기요금 줄인상이 불가피해 아베 정권에는 적지 않은 부담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