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2월26일] 상하이공동성명


1972년 2월27일 오후7시33분, 중국 상하이 금강반점. 5시간 이상 기다리던 기자들 앞에 헨리 키신저 백악관 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이 나타났다. 미ㆍ중 상하이 공동선언이 발표된 순간이다. 양국의 입장과 합의사항으로 구성된 공동선언의 핵심은 ‘중공이 중국을 대표하며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는 점. 대만에 주둔한 미군과 군사시설을 점진적으로 철수시키다는 데도 의견을 모았다. 미묘한 문구 차이가 있었지만 미국과 중국은 공동선언으로 중공정권 수립 이후 24년간 이어온 적대관계를 청산했다. 중국과의 관계개선에 미국은 온갖 힘을 쏟았다. 닉슨이 전격적으로 중국을 방문한 뒤 7일 동안 마오쩌둥 주석과 한 차례, 저우언라이 총리와 여섯 차례 회담한 끝에 공동성명이 나왔다. 미국 대통령이 한 국가를 일주일 이상 공식 방문한 사실 자체가 전례 없던 일이다. 양국이 화해한 이유는 두 가지. 소련이라는 공동의 적과 경제난 때문이다. 미국은 끝없이 돈이 들어가는 베트남전에서 발을 빼는 데 중국의 협조가 필요했다. 소련에 대한 포위망에 중국을 끌어들이고도 싶었다. 중국 역시 마찬가지. 안보위협 요인인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세계 인민의 적’으로 규정했던 미국과 손을 잡았다. 상하이 공동선언은 얄타회담 이후 고착된 미국과 소련 양극이 주도하는 냉전체제를 다극체제로 변화시켰다. 중국의 국제사회 진입도 더욱 빨라졌다. 당시 회담 기록에는 닉슨과 저우가 ‘남이든 북이든 한국인들은 지나치게 감성적이어서 강대국의 지도를 받을 필요가 있다’고 합의한 대목도 있다. 패권을 추구하지 않겠다고 명시한 상하이 공동선언을 도출하는 테이블에서조차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보호 대상’이라고 여긴 셈이다. 우리의 교역 파트너 1, 2위가 바로 이들이다.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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