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0월11일] 헨리 하인즈


하인즈(Henry Heinz)의 야채는 불티나게 팔렸다. 대부분의 농가가 먹고 남은 것을 내놓던 19세기 중반에 싱싱한 것만 골라 팔았으니까. 포장도 없던 당시에 그는 야채를 투명한 병에 담아서 내놓았다. 품질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유상표까지 붙였다. 하인즈의 이때 나이가 아홉 살. 1844년 10월11일, 피츠버그에서 독일계 이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밭일을 놀이 삼아 자랐다. 여덟 살 때부터 텃밭의 채소를 팔기 시작한 지 일년 뒤 그의 사업은 급격히 커졌다. 주상품인 고추냉이를 유리병에 담고 상표까지 부착하는 차별적 영업이 먹힌 덕분이다. 조그만 놀이터였던 그의 밭은 열두 살이 됐을 때 1만4,000㎡(약 4,230평)로 늘어났다. 하인즈의 농산물은 대형 도매상들의 마차에 실려 피츠버그 시내에 깔렸다. 신학교에서 상업학교로 옮길 무렵인 열일곱 살 때 연간 순소득이 2,400달러. 미국인 일인당 명목소득이 142달러에 머물던 시절이다. 소년의 천부적인 상재(商材)가 꽃 핀 것은 30대 이후. 부친의 벽돌사업을 돕다 스물다섯에 식료품 사업을 시작, 번창했으나 1875년 공황(1873년)의 여파로 부도를 맞은 뒤 연구개발에 매달려 출시한 신제품 ‘토마토 케첩’이 대박을 터뜨렸다. 원조인 중국에서 영국에 전해지기까지 온갖 양념장류의 통칭이었던 ‘케첩’이 토마토 케첩으로 고유명사화한 것도 이때부터다. 영업에서도 앞서나갔다. 공장 견학과 전광판 설치도 하인즈가 최초다. 전문 세일즈망 구축과 종업원복지제도의 선구자로도 꼽힌다. 사망(1919년ㆍ75세) 후에도 그의 회사는 계속 성장, 오늘날 ‘하인즈 식품’으로 남아 있다. 하인즈가 문을 연 식품산업의 세계시장 규모는 약 3조달러. 거대한 시장이 여기에서 시작됐다. 소년의 창의력과 경영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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