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에서 박싱데이(Boxing Dayㆍ크리스마스 이튿날)가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리그 전체 38경기 중 한 경기일 뿐이지만 박싱데이 직후의 순위가 시즌 끝까지 굳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 박싱데이를 전후로 짧게는 이틀 휴식 뒤 경기를 치르는 ‘살인 일정’을 소화해야 하기에 강팀과 약팀의 간격이 급격히 벌어지게 된다. 잔뜩 웅크렸던 팀들이 본격적으로 도약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호시탐탐 선두를 엿보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박싱데이 대승으로 리그 1위 맨체스터 시티와의 승점차를 ‘0’으로 줄였다. 14승3무1패(승점 45)가 된 맨유는 골득실에서 맨시티에 뒤져 2위에 머물렀지만 선두 탈환이 머지 않았다. 맨시티는 웨스트브로미치와 0대0 무승부에 그치면서 비상이 걸렸다.
리그 판도를 뒤흔드는 귀중한 완승의 중심에 박지성(30)이 있었다. 박지성은 27일(이하 한국시간) 맨체스터의 올드트래퍼드에서 벌어진 위건과의 리그 18라운드 홈경기에 선발 출전, 풀타임을 소화했다. 전반 8분 선제 결승골에 이어 후반 32분 페널티킥 유도로 도움을 올리면서 5대0 대승의 처음과 끝을 장식했다.
4경기 연속 결장 뒤 지난 22일 풀럼전 교체 출전으로 예열을 끝낸 박지성은 ‘기분 좋은 상대’ 위건을 맞아 작정한 듯 공격본능을 과시했다. 2005년 웨스트브로미치전 도움에 이어 이듬해 위건전에서 페널티킥을 이끌어내는 등 박지성은 박싱데이만 오면 산타클로스처럼 날아다니곤 했다.
왼쪽 미드필더로 나서 페널티지역을 맴돌며 기회를 엿보던 박지성은 왼쪽에서 올라온 ‘절친’ 파트리스 에브라의 땅볼 크로스를 영리한 터치 하나로 골로 만들었다. 오른발 안쪽으로 간결하게 민 슛은 달려들던 수비수를 피해 골키퍼가 꼼짝 못하는 골망 오른쪽 구석에 꽂혔다. 지난 8월 말 아스널전 이후 넉 달 만에 터진 시즌 2호골이었다. 자신감이 붙은 박지성은 수비에서도 별명에 걸맞게 모기처럼 끈질긴 괴롭힘으로 수 차례 공격권을 빼앗더니 후반 막판 페널티킥을 얻어내 디미타르 베르바토프의 해트트릭을 도왔다. 1골 4도움에서 정체 중이던 시즌 성적도 2골 5도움으로 늘었다. 박지성은 경기 후 “맨시티를 제치고 선두로 나서야 한다. 에브라의 패스가 고마웠다”고 말했고 스카이스포츠와 맨체스터 이브닝뉴스는 박지성에게 평점 8의 높은 점수를 줬다. 특히 “여러 개의 폐를 달고 페널티지역을 헤집어 위건 수비진을 공황에 빠뜨렸다”는 이브닝뉴스의 평가가 눈길을 끌었다.
경쟁자 애슐리 영의 부상 속에 자신의 가치를 더욱 드높인 박지성은 31일 오후9시45분 블랙번전을 끝으로 2011년을 마무리한다. 리그 1위를 뺏은 뒤 새해를 맞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