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된 유럽'의 꿈을 안고 탄생한 유럽연합(EU)이 출범 22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영국에서는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Brexit)를 묻는 국민투표 시행법안이 1차 관문을 통과했고 그리스 구제금융 협상은 점점 더 꼬이면서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Grexit) 가능성을 고조시키고 있다.
9일(현지시간) BBC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영국 하원은 이날 EU 탈퇴 국민투표 시행법안을 표결에 부쳐 찬성 544표, 반대 53표의 압도적 표차로 통과시켰다. 앞으로 추가 표결 등을 거쳐 의회를 최종 통과하면 국민투표를 시행해 '영국이 EU 회원국으로 남아야 하는가'를 국민들에게 묻게 된다.
필립 해먼드 영국 외무장관은 "지난 1975년 EU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CC) 잔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 이후 EU와 영국의 관계에 관한 국민투표가 전혀 없었다"며 "한 세대의 유권자들이 EU와 영국의 관계에 관한 발언기회를 갖지 못했는데 이제 그 권리를 얻고자 한다"고 법안의 의의를 설명했다.
앞서 영국은 이민 정책과 EU 분담금 문제 등으로 줄곧 EU와 대립각을 세워왔다. 자유로운 이민을 장려하는 EU와 달리 영국은 불법노동자 임금 압류, 이민자 복지혜택 축소 등 강력한 이민제한 정책을 추진했으며 EU가 정한 경제규모에 따른 분담금 납부 기준이 영국에 불리하다며 강하게 반발해왔다. 집권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역시 여론을 의식해 오는 2017년까지 영국의 EU 탈퇴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거듭 공언했으며 지난달 총선에서도 재집권에 성공해 브렉시트의 현실화 가능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르면 내년에 국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하원 표결 이후 캐머런 총리는 "EU와의 협상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으면 정부 차원에서 EU 잔류 입장을 정하고 국민투표에서 잔류 캠페인을 벌이겠다"고 한발 물러섰지만 보수당 강경세력을 비롯해 자유당 등 야당도 캐머런 총리가 EU 협약에서 더 강경한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EU 탈퇴 캠페인을 벌이겠다고 강하게 압박하고 있어 한번 불붙은 브렉시트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다소 진정되는 듯했던 그렉시트 우려도 다시 커지고 있다. 구제금융 지원을 위해 채무조정 협상을 벌이는 국제채권단과 그리스는 별다른 진전 없이 줄다리기만 하고 있다. 그리스는 채권단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지 않으면 당장 이달 말로 예정된 국제통화기금(IMF) 채무 15억3,000만유로(약 1조9,189억원)을 갚지 못해 디폴트(채무불이행)을 선언해야 할 처지지만 채권단의 긴축 강요에 맞서 좌파정부는 연금개혁·세수확대 등을 강하게 거부하고 있다.
이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장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이 그리스의 새 예산안이 9일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가 내놓은 안보다 더 후퇴했다며 불만을 나타냈다고 보도했다. 그리스는 새 예산안에서 재정수지 흑자 목표치를 올해 국내총생산(GDP)의 0.75%, 2016년 1.75%, 2017년 2.5%로 채권단과 합의한 수준보다 더 낮게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부가세 인상을 통한 내년 세수확대 규모를 채권단이 요구한 18억유로에 한참 못 미치는 13억6,000만유로로 제시해 채권단을 실망시켰다.
최종 협상 타결이 또 물 건너가면서 이달 말 대규모 채무상환을 앞둔 그리스의 앞날과 그렉시트에 대한 불안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EU 관계자는 "기술적으로 보면 협상 타결은 여전히 어렵다"면서 "예산안에는 노동시장 개혁처럼 채권단과 그리스 간의 이견이 여전한 주제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지 않다"고 밝혔다.
또 다른 EU 회원국 포르투갈도 암초로 부상하고 있다. 9월로 예정된 총선에서 승리를 거둘 것으로 예상되는 사회당은 긴축 반대, 세금감면을 내세우며 구제금융을 지원하는 채권단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전문가들은 사회당이 집권하면 채권단과의 갈등이 불가피하고 이로 인해 구제금융이 끊기면 포렉시트(포르투갈의 유로존 탈퇴·Porexit)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