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 '호두 까기 인형'과 '몽실 언니'

최태지 <정동극장장>

[로터리] '호두 까기 인형'과 '몽실 언니' 최태지 최태지 “어떤 공연이 가장 기억에 남으세요.” 인터뷰할 때 많이 받는 질문이다. 오랜 주역 발레리나 생활과 국립발레단장이라는 이력을 보고 사람들은 으레 외국의 어느 화려한 무대 이야기를 기대하는 눈치다. 그러나 필자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몇년 전 어느 지방 소도시 마을회관에서 올렸던 무료공연이었다. 그곳은 도시라기보다는 작은 시골마을에 가까웠다. 무대시설은 형편없었다. 주민들도 평생 공연장 한번 가보적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촌로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곳에서 클래식 발레공연이라니.’ 기가 막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공연은 7시30분인데 4시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한 것이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오신 할아버지 할머니, 밭일하던 옷차림으로 온 아줌마, 포대기에 아기를 업고 온 순박한 새댁, 얼굴이 시커멓게 탄 코흘리개 동네 꼬마들…. 공연 분위기도 서울과는 딴판이었다. ‘백조의 호수’가 시작되자 객석에서는 “오메 오메 예쁘다”는 탄성이 터져나왔다. 주역 발레리나에게는 “제가 대장이야 대장” 백조들이 나오자 “어머머 새끼들이 나왔네”라며 무대 위 일거수일투족에 마치 추임새를 넣는 것처럼 객석은 야단법석이었다. 문화생활과는 너무나 먼 곳에 있던 그분들이 공연에 빠져들어 울고 웃는 모습은 필자의 무대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다가왔다. 그곳에는 최고급 오페라하우스 공연에서 절대 느낄 수 없었던 진솔한 감동이 있었다. 고급스러운 무대에서만 공연하던 필자에게 그날의 사건은 충격이었다. 작고 열악한 시골무대에서 문화의 진정한 힘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요즘 문화산업의 대세는 최고급, 초호화, 초대형 블록버스터인 듯하다. 수십억을 쏟아부은 대형공연이 꼬리를 물고 수십만원짜리 티켓은 이제 놀랍지도 않은 세상이다. 물론 품격 있는 대형무대는 필요하지만 경제가 어려운 요즘 그런 무대를 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지친 사람들의 삶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는 작고 소박한 무대는 실종된 느낌이다. 그런 면에서 필자가 일하는 정동극장은 특별한 곳이다. 초호화 공연상품을 파는 문턱 높은 곳이 아니라 작지만 진솔한 감동을 주는 무대가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제 곧 연말이다. 올 겨울에도 화려한 공연이 줄을 이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필자도 매년 이맘 때쯤이면 꿈과 환상의 최고급 클래식 발레 ‘호두 까기 인형’을 준비했다. 하지만 올해 정동극장에서 준비하는 공연은 가족극 ‘몽실 언니’다. 경제가 어려워 온 나라가 힘든 요즘, 힘겹게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에게 작더라도 진정한 무대의 감동을 선사하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에 필요한 문화의 힘 아닐까. 진실한 공연 한편은 우리에게 인간다움을 상기시켜주고 앞으로 살아갈 마음의 힘을 북돋워주기 때문이다. 입력시간 : 2004-11-21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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