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예산을 수립하는 기획재정부 예산실은 부처 가운데 유일하게 '갑'의 위치에 선다. 부처마다 예산실 관료를 상대로 로비전을 벌이는 것은 오래된 관행이다. 예산실은 그럼에도 부처들이 올린 예산에 칼질을 해야 하는데 재정부는 재정건전성 확보를 위해 각 부처가 요구한 예산을 중기재정계획에 맞춰 대폭 깎기로 했다. 당장 중기재정운용계획상 내년도 예산액이 324조8,000억원인 점을 감안하면 부처 요구분 중 25조원 안팎이 삭감될 것으로 보인다. 14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재정부는 각 부처가 제출한 향후 5개년(2011~2015년) 중기사업계획서를 토대로 과도한 재정요구를 조정하기 위해 오는 24일까지 정책토론회를 연다. 각 부처 요구를 그대로 들어줄 경우 균형재정은커녕 나랏빚이 눈덩이처럼 커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계획서에 따르면 각 부처는 내년에 총 351조3,000억원의 예산을 요구해 당초 정부 중기계획보다 26조5,000억원 추가됐다. 각 부처 중기 요구액의 연평균 증가율은 7.4%로 원래 계획(4.8%)보다 크다. 이대로라면 2015년에는 나라 예산이 무려 411조7,000억원에 달해 지금보다 102조원 가까이 늘어나게 된다. 부처별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면 2014년에 재정 수지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2.4%, 2014년 -1.7%로 적자 재정이 지속되고 국가채무는 2014년에 GDP 대비 35% 수준, 2015년 33% 수준으로 정부 목표치인 '2013~2014년 균형재정 및 국가채무 30%대 초반'에서 크게 벗어나게 된다. 재정부의 한 관계자는 "재정건전성 강화에 중점을 두면서도 정부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선택과 집중의 원칙을 지키고자 한다"며 "우선 각 부처의 중기 투자방향 및 적정 투자규모, 핵심이슈 등을 재정부와 공유하려 한다"고 말했다. 중기계획이 어그러질 위기에 처한 재정부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우선 36개 부처 중 복지부 등 24개 부처를 직접 방문해 정부 재정 상황의 이해를 구하고 사업 규모 조절을 위한 설득에 나선다. 예산편성에 앞서 일방적으로 통보해왔던 과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재정부 뜻대로 중기재정계획이 세워질지는 장담할 수 없다. 지난 2009년 당시 정부는 2011년 재정지출 목표로 306조6,000억원을 설정했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2조5,000억원이나 늘어났다. 2010년 예산(292조8,000억원) 역시 2008년 중기예상치(290조9,000억원)보다 2조원가량 많았다. 특히 지난해 천안함ㆍ연평도 사태를 계기로 정부가 국방분야 투자를 늘리기로 한 것을 비롯해 복지, 연구개발(R&D)에 대한 장기적 예산 수요도 당분간 증가할 수밖에 없다. 최근 구제역 사태 등에 따른 단발성 재정지출 수요 역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정부 건전재정 확충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재정부는 이번 정책토론회를 시작으로 각 부처와 협의해 내년도 부처별 지출한도를 설정한 뒤 2011~2015년 국가재정운용계획 수립에 착수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