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조선인보다 더 조선 예술을 사랑한 일본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야나기 무네요시'전 열어<br>일본민예관 소장품 등 전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다음달 요미우리신문에 일제의 무력진압을 비판하는 글이 실렸다. '조선인을 생각한다'라는 이 기고문은 다섯 차례나 이어졌고 1년 뒤인 1920년 동아일보에 한국어로 소개됐다. "반항하는 그들보다도 어리석은 것은 압박하는 우리다.(…) 칼의 힘은 결코 현명한 힘을 낳지 않는다." "내가 조선과 조선민족에게서 느끼는 누를 수 없는 애정은 그 예술에서 받은 충동에 의한 것이었다.(…) 나는 그 예술을 통해 깊은 존경의 마음을 조선에 바치지 않을 수 없다."


글의 주인공은 당시 30세의 젊은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였다. 일본 공예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조선의 공예를 조선인보다 더 사랑했다고 한다. 27세 때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 등을 답사하고 서울 아현동에서 조선백자와 공예품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뒤 21차례나 현해탄을 건넜다. 일제가 광화문을 철거하려 할 때는 '아! 광화문'이라는 글을 발표하고 해체를 막아냈다고 한다. 35세 때인 1924년에는 "조선 물품은 조선에 있어야 한다"며 경복궁 집경당에 조선민족미술관을 개관했고 일본으로 돌아가서는 도쿄에 일본민예관을 설립했다. '민예(民藝)'라는 말을 창시한 주인공도 그였다. 한국 정부는 1984년 고인이 된 그에게 보관문화훈장을 추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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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이 서울 덕수궁관에서 일본민예관 소장품과 자료 139점을 중심으로 한 '야나기 무네요시'전을 오는 7월 21일까지 연다. 전시는 서양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해 조선으로, 다시 일본과 중국 만주 등 동양 세계로 확장된 야나기 미학의 발달 과정을 총 3부에 걸쳐 보여준다.

1부 '서유럽 근대 문화에 대한 관심과 연구'에서는 서구 예술에 심취한 젊은 시절을 다룬다. 야나기는 도쿄대에서 서양미학을 전공해 윌리엄 블레이크 등 서구 미술가에 관심을 가졌고, 홍콩 출신의 영국인 도예가 버나드 리치와 교유하며 예술에 관한 시야를 넓혔다. 블레이크 판화의 복제품, 리치의 타일 공예품 '숲 속의 호랑이', 서구 문화를 소개하는 잡지로 그가 기획ㆍ편집부터 표지 디자인까지 맡았던 '시라카바' 등이 청년 야나기의 미학적 취향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2부 '조선과의 만남'은 조선에서 수집한 공예품으로 채웠다. 조선 백자 '철사운죽문항아리'와 담배상자, 연잎 모양 개다리 소반 등을 볼 수 있다. 중국 대륙으로 관심의 영역이 확장되는 야나기의 변화는 3부 '주변에 대한 관심과 민예'에서 만날 수 있다. 민간 공예품의 미학을 발견해 '민예론'을 발전시킨 과정과 이 이론을 뒷받침하는 작품을 소개한다. '민예론'을 정립하는 계기가 됐던 무명 작가 모쿠지키 쇼닌의 소박한 나무 불상을 비롯해 류큐 지방의 직물 문양, 그가 직접 만든 소박한 의자가 눈길을 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제국주의 문화통치의 조력자'라는 비판적인 시각도 흘러 나온다. 야나기는 동북아 3국의 예술에 대해 '중국=힘=형태', '일본=즐거움=색', '조선=슬픔=선'이라는 도식을 제시했는데 이런 시각이 '조선은 수동적인 민족'이라는 일제의 제국주의적 발상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는 비판에서다. 그러나 조선 문화재의 가치를 그대로 인정하고 더 나아가 함께 지켜가려 애를 썼던 외로웠던 한 일본인의 노력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관람료 5,000원. (02) 2022-0600


정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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