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BIZ플러스 영남] '고래특구'로 지정, 장생포의 어제와 오늘

1986년 상업포경 금지이후 쇠락의 길

[BIZ플러스 영남] '고래특구'로 지정, 장생포의 어제와 오늘 1986년 상업포경 금지이후 쇠락의 길 울산=김정숙기자 울산 남구 장생포항은 용잠반도가 큰 바다에서 밀려오는 강한 파도와 바람을 막아주는 덕분에 배가 정박하기에 아주 좋은 ‘천혜의 부두’로 인정받아 왔다. 장생포항은 지난 1899년 러시아가 태평양 연안에서 잡은 고래해체기지를 세우면서 포경전진기지로 자리잡게 됐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 포경업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으며 우리나라는 광복 이후 46년부터 본격적으로 고래잡이에 뛰어 들었다. 1960년대 들어서 일본 수출 길까지 열리면서 40여년동안 포경 황금기를 누렸다. 전성기 때 장생포는 울산지역에서 ‘부의 상징’이었다. 시쳇말로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시절이었고, ‘울산군수 할래? 고래잡이배 포수(砲手) 할래?’라고 물으면 누구나 포수를 선택할 정도였다고 한다. 고래를 실은 배가 항구로 들어오는 고동 소리가 들리면 마을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이런 호시절을 누렸던 장생포는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IWC)의 상업포경 금지조치 이후 점차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장생포는 지형적으로 앞쪽 바다 외에는 산과 언덕이 대부분이어서 농사를 짓기도 힘들어 이곳 주민들에게 고래는 생계수단이자 주된 양식이었다. 이런 장생포 사람들에게 포경 금지는 삶의 터전을 잃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선주와 포수 등 포경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먹고 살 길을 찾아 하나 둘씩 떠날 수밖에 없었다. 삶의 활기가 흘러넘쳤던 장생포 거리에 사람의 발길도 줄어들었다. 인구도 급격히 빠져나가 1만5,000명이 넘었던 주민이 10분의1인 1,500명까지 줄어들었다. 한때 2,000명이 넘어 오전·오후반으로 나뉘어 수업했던 장생포초등학교 학생은 최근 60여명까지 감소해 아이들의 함성소리 듣기도 힘들어졌다. 장생포는 인구 감소에 따라 98년 인근 야음1동에 합병됐고 당시 ‘야음1장생포동’(현재는 ‘야음장생포동’)이 되면서 단지 이름으로나마 명맥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장생포는 우리에겐 여전히 ‘고래’의 대명사로 남아있다. 비록 몇몇 고래고기집과 박물관, 고래축제 등으로만 포경의 희미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지만 이제 과거의 영화를 되살리려는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 관련기사 ◀◀◀ ▶ [BIZ플러스 영남] '고래도시'가 부활한다 ▶ [BIZ플러스 영남] '고래특구 지정' 이렇게 생각한다 ▶ [BIZ플러스 영남] '고래특구'로 지정, 장생포의 어제와 오늘 ▶ [BIZ플러스 영남] 허병익 부산지방국세청장 ▶ [BIZ플러스 영남] 유홍섭 (사)중소화학기업協회장 ▶ [BIZ플러스 영남] 부산 시티투어 버스 남항대교도 경유 外 ▶ [BIZ플러스 영남] 구미공단의 ㈜위드시스템 ▶ [BIZ플러스 영남] 울산상의, 자원개발외교 '결실' ▶ [BIZ플러스 영남] 고리원자력본부, 대학생 221명에 장학금 ▶ [BIZ플러스 영남] 대구백화점 추석맞이 행사 다채 ▶ [BIZ플러스 영남] "강의료 불우이웃 위해 씁니다" ▶ [BIZ플러스 영남] S-OIL온산공장 임직원 환경정화 활동 ▶ [BIZ플러스 영남] 대구銀 창립 41주년 9·10월 고객 사은행사 ▶ [BIZ플러스 영남] 설립 10주년 '경북테크노파크' ▶ [BIZ플러스 영남] 신생 기업 에코윈 기술 개발 창업 경진 대회서 최우수상 ▶ [BIZ플러스 영남] 경남은행 '행복 이벤트' 실시 ▶ [BIZ플러스 영남] 경남도립 남해대학 혼자 웃는 김대리~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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