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문복 하나대투증권 e비즈니스지원부 부부장
우리나라 최초 증권거래소인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이 설립된 것은 지난 1920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장 초 하루 평균 거래량이 1,000주를 밑돌 정도로 거래부진에 빠졌던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은 1차 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전환기를 맞는다. 갑자기 거래량이 폭발하며 당시 증시에 상장된 경성주식현물취인소 주식도 1년 새 10배 가까이 폭등했다. 하지만 상승 랠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경성주식현물취인소는 관동대지진에 이은 쇼와금융공황과 미국 대공황 등으로 결국 1896년 파산하는 처지에 놓인다. 이른바 ‘경성주식현물최인소 주식파동’이다. 이후 여러 변모를 시도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일본의 패망과 함께 1946년 1월 미군정청의 해산령에 따라 국내 증시 역사에서 자취를 감춘다.
경성주식현물취인소가 사라진 뒤 다시 거래소가 설립된 것은 10여 년이 지난 1956년 6월이다. 당시 지가증권이나 국채를 중심으로 거래했던 대한증권거래소는 ‘1.16 국채파동’등으로 3년간 침체를 겪는다.
그 뒤 1961년 정권을 잡은 군부가 증권거래법을 제정하며 대한증권거래소를 주식회사 형태로 전환했으나 곧 또 다른 위기에 봉착한다. 중앙정보부가 공화당 창당자금을 마련하고자 증권업계 대부 윤모씨(통일ㆍ일흥증권 설립자)와 일으킨 ‘5월 증권파동’이 그것이다. 당시 대한증권거래소출자증권은 1961년 9월 이후 7개월 만에 200배 가량 폭등하기도 했으나 결국 결제업무 불이행 등 사태로 폭락했다. 이 같은‘5월 증권파동’ 여파 탓에 대한증권거래소는 결국 증시 퇴출이라는 씁쓸한 결과를 낳았다.
국내 증권거래소가 한 번의 해산과 상장폐지를 겪었던 역사 속에는 몇 회에 걸친 증권파동이 자리하고 있다. 과거 증권거래소 상장은 파동 등 큰 후유증을 남을 남겼다. 하지만 증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었다는 점은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 “한국거래소의 공공기관 해제를 검토한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특히 한국거래소가 꾸준히 ‘증시 진출’을 강조한 만큼 공공기관 해제는 곧 상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거래소 상장이 증시파동을 낳았던 지난 날은 과거에 불과하다. 이미 한국거래소도 선진증시 수준에 올랐다. 대부분 선진시장의 거래소가 증시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한국거래소의 공공기관 해제에 이은 상장은 지금도 늦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