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뉴질랜드 한인공동체(한민족경제권이 떠오른다)

◎무역·투자 활성화 ‘상권자립’ 꿈꾼다뉴질랜드에서 한민족 공동체는 이제 겨우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싹은 의외로 빨리 자라고 있다. 뉴질랜드인들은 한국이 1950년 전쟁당시 5천여명의 자국 청년들이 피흘리며 지켜준 나라, 그래서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쯤으로 오랫동안 기억했다. 우리에게도 뉴질랜드는 「경치좋고 살기좋은 나라」일 뿐 세계 속의 한민족공동체를 구성하는 파트너의 하나로 인정하는데 인색했다. 뉴질랜드에서 만난 한국 교민들은 대부분 첫마디가 『살기 무척 어렵다』는 푸념이었다. 뉴질랜드의 경제여건이나 한국교민들의 경제활동 영역만 봐서는 우리가 고대하는 「한민족 경제권」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않다. ◎국내 대기업 진출 붐… 현재 20여건 합작진행/교민들 움직임­녹용·양모가공 등 제조업체 설립 기반잡기 가속 한국 문구제품 최고급품 인정 쇼핑가서 돌풍/사업기금 모금­5,000만불 목표로 1만5,000명 대상 올 4월부터 전개 호텔·골프장 등 레저산업 진출외 유통·금융업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수십년 역사를 지닌 미국이나 일본이민과 달리 뉴질랜드 이민역사는 고작 4­5년에 불과하다. 한국인이 이 땅에 처음 발을 디딘게 지난 74년 김진영씨 부부의 취업이민이었다. 그마저 맥이 거의 끊겼다가 87년 투자이민이 허용되면서 한인들의 모습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실제 한인들이 대거 쏟아져 들어온 건 지난 92년 일반이민이 허용되면서부터. 그러나 지금 뉴질랜드에서는 1만5천여 교민들을 중심으로 한민족 공동체가 싹을 티워 제법 그럴듯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기업들도 뉴질랜드의 무한한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우선 일부 대기업을 중심으로 뉴질랜드 진출이 급증하고 있다. (주)선경이 호주현지법인의 자회사형태로 들어와 철강수입에 나서고 있으며 효성물산과 현대목재가 뉴질랜드 목재를 수입하는 현지법인을 진출시켰다. 동원수산, (주)동남, 오양수산 등이 남태평양 어업의 전진기지로 뉴질랜드를 활용하고 있다. 최근엔 오뚜기식품이 식품, 청과물 생산분야에 뛰어들어 연 4백만달러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한솔그룹의 한솔포렘은 4천만달러를 투자, 동부지역 조림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2014년께부터 본격적으로 수확을 거둘 예정이다. 투자규모는 미미하지만 8월말 현재 20여건의 투자가 진행중이다. 풍부한 자원과 사회간접자본, 간단한 회사설립절차, 개방된 시장 등이 뉴질랜드 투자의 장점으로 꼽힌다. 인구 3백60만명의 나라여서 내수시장이 협소하고 양질의 노동력이 부족하다는 약점이 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나라라는게 현지진출 기업관계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또 지난 8월엔 국민은행이 한국계 금융기관최초로 뉴질랜드 금융시장에 진출했다. 대부분 외국진출 국내은행들이 기업을 상대로한 도매금융에 치중하는데 비해 국민은행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예금받고 대출도 취급하는 소매금융분야에 뛰어들었다. 국민은행 장준섭오클랜드사무소장은 『뉴질랜드 한민족 경제권의 중요한 축으로 금융까지 가세한 사건』이라고 자평했다. 국민은행이 뉴질랜드 중앙은행으로부터 업무승인을 받은 지난 7월 15일 「뉴질랜드해럴드」지는 칼럼을 통해 『국민은행의 뉴질랜드 진출은 1만5천여명의 재뉴질랜드 교민과 4천여명의 유학생들 뿐 아니라 뉴질랜드 금융부문의 발전에도 유익하다』고 평가했다. 은행이 진출하고 국내 기업들까지 잇따라 뉴질랜드로 눈길을 주고있지만 현지 교민들과의 연대는 아직 미흡한 게 사실이다. (주)선경의 이근홍소장은 『현지진출 기업들은 대부분 원자재 확보와 본국수출에 치중하고 있어 아직 교민사회에 경제적인 혜택을 나눠줄 정도는 아니다』며 『교민들과 현지진출 기업들을 경제적으로 이어줄 계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최근 뉴질랜드 교민들 사이에선 진정한 한민족 경제권 형성을 모색하는 분위기가 살아나고 있다. 이곳 교민들은 대졸이상의 고학력자들이 대부분이고 한국에서 일류직장을 다닌 경험을 갖고있다. 이민의 동기도 「밑바닥부터 체험하며 치열하게 살기 위해서」라기보다 「편히 쉬려고」 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클랜드 한국무역관의 김종식소장은 『이민자의 30%미만이 취업전선에 나서고 있으며 그나마 뉴질랜드 현지기업에 취직한 인구는 교민의 10%에도 못미친다』며 『50%정도가 취업을 원하는 데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최근들어 분위기가 완연히 달라지고 있다. 한국무역관이 지난 6월9일 첫 배출한 무역학교 졸업생들이 본격적으로 뉴질랜드 경제권에 편입해가는 과정도 교민사회의 새로운 바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많은 교민들이 자립을 위해 활발히 움직이고 있고 덕분에 무역학교는 넘치는 지원자를 선별하느라 즐거운 몸살을 앓고 있다. 무역을 통해 본국과의 연계를 강화하고 뉴질랜드에 한국상품을 소개하는데 나서기 시작했다. 중소기업 경영자들도 한둘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1차산업 중심인 뉴질랜드에서 제조업으로 발붙이기는 여간 어려운게 아닌데도 적지않은 교민들이 제조업분야에서 기반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인 분야가 녹용사업. 수십년간 내다버리기 바빴던 사슴 뿔을 70년대이후 진출한 한국인들이 긁어모으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녹용사업을 벌였다. 현재 10여개 한국계 기업이 뉴질랜드 각지서 녹용관련 사업을 벌이고 있다. 모닝글로리 등 문구류 수입업체도 최근 2­3년새 뉴질랜드에 진출,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한국제 문구류는 이제 뉴질랜드에서 최고급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덕분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소매점이 오클랜드를 비롯한 뉴질랜드 주요도시의 중심쇼핑가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뉴질랜드 교민중 전문직에서 제자리를 잡은 사람은 아직 드물지만 미래는 밝다는 평. 한국인 변호사는 아직 한명밖에 배출되지 않았지만 현재 오클랜드대학에만 1백여명의 교민자녀들이 공부하고있다. 의사도 드물지만 3­4명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개별적인 활약상과는 달리 최근 뉴질랜드 교민사회에서는 전개되고 있는 새로운 움직임은 주목할만하다. 지난 76년 에버그린라이프사를 설립, 녹용사업으로 성공한 이형수사장은 지난 4월부터 KKBF(한­뉴 사업기금. Korean Kiwi Business Fund)를 설립하려는 운동을 시작했다. 미화 5천만달러규모의 기금을 마련, 한민족 공동체의 전형을 창조해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교민들이 갖고온 투자자금들이 대개 「투자실패」를 우려, 장농속에 잠자고 있는게 현실인데 이사장은 자신부터 3백만달러를 투자하겠다고 깃발을 들었다. 자금이 조성되는대로 1백10만평에 이르는 택지개발을 시작하고 호텔, 골프장, 실버타운 등 레저산업은 물론 유통, 종합금융사업에 진출한다는 계획이다. 이사장은 지금 사업계획의 타당성검토를 끝내고 교민들을 접촉중이다. 상당수 교민들은 『과연 잘 되겠나, 그러다 망하는것 아니냐』는 얘기를 하곤했지만 지금은 성공을 바라는 교민들을 많이 만난다는 이사장. 그는 『우리가 자립하면 뉴질랜드인들이 우리를 다시 본다』며 『한인사회의 자생력을 창출하는 길이며 뉴질랜드 사회에 기여하는 길이라는 확신이 있다』고 밝혔다. 뉴질랜드 교민들은 『키위(뉴질랜드인들은 스스로를 이렇게 부른다)들은 한국을 잘 모른다』고 얘기한다. 뉴질랜드가 1950년 한국전쟁당시 5천여명이 참전한 혈맹관계여서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한국은 「전쟁」과 「폐허」의 이미지가 강하다. 한국전쟁당시 뉴질랜드에 TV가 처음 도입돼 전쟁상황을 생생히 지켜본 영향이 컸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지난 94년 점수제 이민제도가 도입되면서 영어에 약한 한국인의 이주는 지난해부터 사실상 막혀버렸다. 1만여명에 불과한 한인사회는 이제 새 피를 수혈받을 기회를 사실상 차단당했다. 현지에서 만난 교민들은 대부분 『이민자가 최소 4만명은 돼야 한인사회가 자생력을 가질 것』이라며 아쉬워한다. 그러나 교민들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살아나갈 길을 모색하고 있고 상황이 빠른 속도로 나아지고 있다며 희망에 차있다.<오클랜드=손동영 특파원> ◎인터뷰/이병엽 와일드내이처사 사장/“양털이불 연3백만불어치 전량 수출/이민 2·3세 삶의 발판 제공위해 최선” 이병엽 사장은 지난 94년 9월 와일드내이처라는 양털이불공장을 설립했다. 뉴질랜드인들로부터 양털을 공급받아 이불을 만드는 이 공장은 지금 뉴질랜드 내수시장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고 수출만 한다. 그게 창업의 조건이었다고 한다. 양털이불공장을 설립한 사실만으로도 제조업 진출을 불가능하다고 여겨온 교민들의 상식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나아가 이사장은 최근 플라스틱 공장을 설립, 내수시장에 뛰어들었다. 기계는 한국에서 전량 수입해 뉴질랜드인들로부터 『여기까지 와서 왜 한국기계만 쓰느냐』는 질시어린 항의도 들었다. 이사장 공장의 연매출액은 5백만달러. 미화로는 3백만달러수준이다. ­뉴질랜드에서 제조업으로 성공을 거두기는 어렵다고 들었다. 대부분 교민이 진출해있는 서비스업을 외면하고 제조업에 뛰어든 배경은 무엇인가. ▲이민 1세가 할 일은 2, 3세들이 살아나갈 길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어느 나라든 제조업에서 뿌리를 내리면 대접받을 수 있고 부가가치 창출도 월등히 유리하다. 물론 현지국가 경제에 기여하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유통이든 음식업이든 결국 제조업의 영향력아래 있는 것 아닌가. ­사업다각화가 진행중이라고 한다. 어떤 생각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나. ▲나는 지금 이 두 공장말고도 화장품회사의 주식을 상당량 보유한 주주다. 화장품회사를 발판으로 유통분야에도 뛰어들 생각이다. 양털이불공장이 뉴질랜드이민의 근거였다면 플라스틱과 화장품 공장은 이 사회에 기여하는 발판이다. 당분간 사업을 더 확장할 생각은 없다. ­사업을 하면서 어려움은 없었나. ▲제조업을 하는 데 있어 규제는 전혀 없다. 한국에서 제조업을 해본 경험이 없어서 비교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사업하면서 규제때문에 고민한 적은 없다. 세금문제도 워낙 투명한 나라여서 오히려 편하다. 세금을 내면서 아 나라에 뭔가 기여하는구나 하는 뿌듯한 마음도 가졌다. ­뉴질랜드 교민사회에 대한 생각은. ▲많은 교민들이 뉴질랜드에선 할 일이 없다고 하소연한다. 그러나 나는 반대다. 위축되지 말아야 한다. 서로 돕는 마음을 갖고 구심점을 찾아야 한다. 어차피 교민사회의 규모가 크지 않으므로 뭉치는게 중요하다고 본다. 제조업에도 꾸준히 진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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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동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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