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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진기자는 보도사진과 순수사진을 구별하는 방법에 대해 “사진 같은 사진은 보도사진이고 사진 같지 않은(추상화 같은) 사진은 순수 사진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언뜻 농담 같지만 이 말은 보도사진을 가장 적확하게 정의한 말일지도 모른다. 신문지면 위에서 사진의 역할은 독자가 가서 볼 수 없는 현장의 모습을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842년 5월 영국신문 일러스트레이트디 런던 뉴스(Illustrated London News)에 처음 사진이 실렸을 때만 해도 사진은 그저 신문을 꾸미기 위한 장식물에 불과했다. 하지만 사진이 글 못지 않은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라는 것이 입증되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1901년 4월18일자 그리스도 신문에 사진이 처음 게재된 이후 불과 50~60년 만에 사진이 강력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치열한 기자정신에 의해 생산된 몇몇 사진은 역사의 흐름을 뒤바꿔 놓기도 했다. 구자호 상명대 사진학과 교수는 “근대사를 뒤바꾼 사진을 꼽으라면 최루탄이 얼굴에 박혀 죽은 시체로 발견돼 4ㆍ19를 촉발시킨 김주열 열사의 사진과 6.10항쟁 때 이한열의 사진이 먼저 떠오른다”며“역사의 한 순간을 기록한 사진으로는 임희순기자(당시 조선일보)의 ‘육여사 피격사건 현장’과 김천길기자(당시 AP통신)의 ‘5.16주역들’의 사진도 빼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밖에 서울신문 김동준기자가 찍은 대연각호텔 화재 사진 ‘탈출’과 한국일보 박태홍기자가 시민회관 화재현장에서 찍은 ‘기적의 소녀’, 고명진 뉴시스국장의 ‘아! 나의 조국’도 기억될 만 하다. 양종훈 상명대학교 사진학과 교수는 이와 관련 “이제 세계 어느 나라의 신문도 뉴스요소로서 사진의 위력을 의심하는 곳은 없다”며“얼마 전까지 사진 없는 지면을 고집했던 프랑스의 르몽드 조차도 사진을 게재하고 있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보도사진의 기세가 욱일승천(旭日昇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50~60년대 풍경화 같은 사진이 지면을 장식하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사건ㆍ사고가 봇물 처럼 터지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물꼬가 터진 민주화 운동으로 연일 거리를 메우던 시위사진도 독자들의 시선을 자극했다. 80년대 들어서는 정치적 이슈와 그 현장을 포착한 사진들이 지면을 뒤덮었다. 바야흐로 보도사진의 황금기였다. 하지만 90년대에 들어 민주주의가 뿌리 내리고 경제 성장에 따른 사회 안정으로 사건ㆍ사고ㆍ정치사진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사건사진으로 승부가 갈리던 시대가 끝나면서 신문 사진의 새로운 정체성 모색을 위한 지난한 여정이 시작 된 것이다. 사건·사고사진 넘어 기획취재 경쟁 가열
비주얼 시대 맞아 TV·인터넷과 힘겨운 싸움
테러·교통사고 등으로 사진기자 잇딴 희생도 보도사진의 정체성 문제와 관련 윤평구 서울경제신문 사진부장은 "이제 보도사진은 사건ㆍ사고 사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스토리텔링(Story telling) 혹은 다큐멘터리 성향이 가미된 심층 기획취재에 눈을 돌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사건ㆍ사고라는 단문 형식의 사진적 토대 위에 다큐멘터리식 장문 형식의 사진을 추구하는 것은 포토저널리즘이 궁극적으로 지향 할 바"라고 말했다. 구자호 교수도 "보도사진은 개인의 삶과 사건의 이면을 파고드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며"사진기자들은 요즘 트렌드인 웰빙, 전원생활 등 사회 현상의 표피적인 스케치에 그칠게 아니라 거기서 한 발짝 더 들어가 깊이 있는 밀착취재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퇴색하지 않는 기자정신 하지만 이 같은 정체성의 고민 속에서도 사진기자들의 투철한 직업정신은 퇴색하지 않고 있다. 한 컷의 특종을 만들어 내기 위해 온 몸을 던지는 사진기자들의 자세는 언뜻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데, 배에서 바다로 꽃을 던지는 사람들을 찍기 위해 허리에 밧줄에 묶고 배밖에 매달려 사진을 찍는 모습이 이를 웅변한다. 때문에 일선 취재현장에서 사진기자들의 희생은 간단없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83년 아웅산테러 때는 고인이 된 최금영 연합뉴스 기자가 현장 사진을 찍고 난 1초후 폭탄이 터져 동아일보 이중연기자 등 사진 속의 여러 인사가 희생됐고, 필름에 흘러내린 핏자국은 사진을 현상하고 인화할 때 마다 나타나 보는 이의 가슴을 저리게 했다. 최금영 기자는 심한 부상에서 회복해 건강을 되찾았지만 아웅산테러가 발생한 지 꼭 20년 만인 바로 그날 숙환으로 숨을 거둬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국일보의 고 김문호기자는 지난 91년 9월27일 새로 세워진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의 고모령 노래비를 취재하다 순직했다. 김기자는 고모령 노래비를 촬영하고 돌아오다가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가수 현인의 노래 '비 내리는 고모령'에 맞아 떨어지는 사진을 찍겠다고 되돌아가 작업을 하다가 뒤에서 달려오는 기차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순직했다. 무등일보의 고 박경완 기자도 지난 93년 7월 27일 아시아나 항공의 737여객기 추락사고 현장을 취재하고 돌아오다 교통사고로 순직했다. 사진조작 위험성도 높아져 방송의 역할 확대에 따라 신문의 속보성이 퇴색하고는 있지만 정보전달이 신문 본연의 임무임은 부인 할 수 없다. 이에 따라 신문들의 비주얼화 경쟁은 날로 그 도를 더해가고 있다. 일단 시각적으로 독자들의 눈길을 붙들어 놓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기사도 읽히지 못한다는 것이 자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구자호 교수는 이와 관련 "읽는 신문에서 보는 신문으로의 전환은 막을 수 없는 대세지만 편집이 신문의 아름다움에 치중해 사진원고에 손을 대다 보니 사진자체의 의미가 훼손되는 경향이 있다"며"일러스트 기술의 발달에 따라 사진조작의 위험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신문사진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진실임을 직시해야 한다"며"일러스트는 작업의 뚜렷한 목적이 있을 때만 그 의의가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인터넷 및 동영상 매체와의 힘겨운 경쟁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하지만 양종훈 교수는 "동영상과 사진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며 "동영상으로는 잡기 어려운 컷이지만 사진으로 잡을 수 있는 컷이 많고, 동영상으로는 보여줄 수 없는 세로 장면도 사진으로는 표현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오히려 신문이나 신문사진의 경쟁자는 인터넷"이라며 "신문이 인터넷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자재교육을 통한 전문화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한편 조선일보 채승우 기자도 현 상황을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했다. "신문사진의 이상은 과거 시점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리는 매체가 신문뿐이었던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다. 같은 태도로 방송 및 인터넷과 경쟁을 하려면, 뒤쳐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다. 사진기자가 사건을 보여주고 설명하는 짐에서 벗어난다면, 더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보도사진이 보다 더 사진적으로 진화할 것이다. '사진적'이라는 게 무엇인지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사진의 문법으로 독자들에게 다가 갈 것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세계적인 보도사진의 흐름에는 예술적 혹은 주관적인 표현이 살아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