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CEO 키워야 기업가치 '쑥쑥'지난 98년 8월29일.
외환위기의 숨가쁜 고비를 어느 정도 넘긴 이즈음, 주택은행은 대단한 모험을 했다. 김정태 당시 동원증권 사장을 주택은행장으로 선임한 것.
비록 같은 금융권이지만 은행과 증권은 자산 규모나 종업원 수, 금융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과 역할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한마디로 실패 가능성이 높은 실험을 단행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결과는 대성공. 김 행장 취임 후 외국인 투자가들의 투자가 봇물처럼 쏟아지면서 주택은행의 주가는 불과 2년만에 9배를 웃돌았다. 외국인 투자가들이 주택은행에 선뜻 투자를 결정한 배경은 말할 필요도 없이 김 행장에 대한 신뢰였다.
당시로서는 신선한 경험이었지만 이제 능력있는 CEO 한 명이 기업 가치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상식이 됐다.
▶ 기업 신뢰와 비전의 척도
스타 CEO는 이제 국내서도 기업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등장하고 있다. 특히 경영 여건이 불확실해지면서 이를 헤쳐나가는 리더십은 갈수록 중요해지는 추세다.
국내 대표기업인 삼성전자의 윤종용 부회장에 대한 외국인 투자가들의 신임은 절대적이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경제 환경 속에서도 디지털가전, 반도체, 통신 등으로 사업의 황금분할을 이끌어낸 능력에 대해 서슴없이 세계 최고 CEO의 반열에 올려놓을 정도다.
부실기업인 한국전기초자를 맡아 초우량기업으로 탈바꿈시켰던 서두칠 사장. 지난해 7월 서 사장이 떠난다는 소식만으로 전기초자의 주가는 폭락했다.
반면 올 초에는 이스텔시스템즈에 합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해당 회사의 주가가 3일 동안 46.1%나 폭등하는 현상이 빚어졌다.
CEO가 기업 전체의 신뢰와 비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려주는 생생한 사례다.
▶ 국가 경쟁력의 감춰진 변수
능력있는 CEO를 얼마나 많이 확보하고 있는가, 나아가 이 같은 CEO를 얼마나 원활하게 육성, 공급할 수 있느냐는 국가의 글로벌 생존력을 좌우하는 또 하나의 변수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일본의 경제 위기는 정보화ㆍ디지털 시대를 맞아 기업 CEO들이 강력한 리더십과 결단력, 빠른 의사결정을 요구받는데도 이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데서 출발한다"고 진단했다.
시장의 평가나 장기적인 계획이 아닌 원로 그룹에 의해 연공서열 방식으로 기업의 명운을 거머쥐는 CEO를 결정하다 보니 ▲ 강력한 리더십을 통한 경영 혁신이 어렵고 ▲ 구조조정이나 신사업 발굴도 더디고 ▲ 위기 돌파도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게 연구소의 분석이다.
미래에 대한 탁견을 갖고 기업의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데 일본기업의 CEO들은 눈치볼 곳도 많고 소양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말이다.
▶ 한국 CEO들의 실력은?
문제는 우리다. 기업의 속성이나 문화적 토양이 분명 틀리지만 일본의 실패 속에 담겨있는 많은 요소들을 한국식 경영에서도 쉽사리 찾을 수 있다.
가장 큰 공통점은 차기CEO를 양성하는 시스템이 구축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고강식 탑경영컨설팅 대표는 이와 관련, ▲ 후계자를 키우는 데 인색하고 ▲ 공개적으로 내부 후계자를 찾는 데 실패했으며 ▲ 스스로의 부와 명예ㆍ권위에 대한 집착과 자부심이 강해 자신과 비슷한 타입의 후보를 찾는다고 꼬집었다.
미국 기업들이 경영자 교육을 위해서만 연간 1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하면서 예비CEO 육성ㆍ선발ㆍ평가ㆍ보상ㆍ지원 시스템을 구축해나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너무 대조적이다.
CEO가 능력을 발휘할 여건을 조성해주는 것에도 인색하다.
"최근 히딩크식 경영학이 인기다. 사실 명확한 비전 제시와 기초 체력 강조, 인력의 적절한 배치로 한국 대표팀을 월드컵 4강으로 끌어올린 히딩크의 능력은 탁월하다.
하지만 그가 프랑스에 5:0으로 패했을 때에도 감독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은 것처럼 CEO가 단기 실적에 연연하지 않고 기업의 체질 강화나 구조조정에 주력할 수 있어야 한다"(국내 상장기업의 한 전문경영인)
경영 환경이 급변할수록 신규사업 개척을 위한 CEO의 결단력과 판단력, 인재 육성 전략 등은 기업의 사활을 좌우하게 마련이다.
이창양 KAIST 경영대학원 교수는 "삼성전자 등 일부 기업을 제외하면 세계적인 CEO가 아직도 크게 부족한 상황"이라며 "싱가포르의 리콴유 전총리가 그랬듯이 정부와 재계가 유능한 CEO 확보를 위해 종합적인 전략을 제시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