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동부그룹/“뚝심경영” 위기에 더 강하다(재벌)

◎「건설업서 출발」영향 불도저식 추진력 정평/“참고 기다린다” 실패 연연 않고 즉각 재도전/21C 대비 유전공학·정보통신 등 미래산업 박차지난 8월10일 하오 3시 서울 중구 초동 동부화재빌딩 14층 대회의실. 주파수공용통신(TRS·Trunked Radio System) 전국사업권을 신청했다가 이날 정보통신부의 사업자선정 발표에서 탈락한 동부그룹 정보통신사업본부 소속 20여명의 임직원들이 회의를 시작하고 있었다. 막판까지 「유력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만큼 탈락소식을 접한 직원들은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TRS사업권 경쟁탈락」이 화제에 오른 것은 불과 20분 남짓에 불과했다. 사업본부장을 맡았던 유시영전무는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고 짤막하게 직원들의 노고를 지적한 뒤 『통신사업은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만큼 이번일을 경험삼아 새롭게 도전하자』고 격려했다. 이어 영업, 기술, 기획 등 각 분야별로 새로 도전할 정보통신 분야에 대한 의견교환이 시작됐고 회의는 초고속망 사업참여방안 등을 논의하느라 3시간 넘게 계속됐다. 동부가 그룹의 사옥으로 쓰고 있는 동부화재빌딩의 엘리베이터는 정원이 7명 남짓으로 최신형에 비해 2분의 1∼3분의 1에 불과하다. 따라서 아침 출근시간과 점심식사 때만 되면 직원들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장사진을 치고 차례를 기다리는 풍경을 연출하게 된다. 사옥이 오래된 탓도 있지만 『엘리베이터가 작아도 굳이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게 이 회사의 입장이다. 동부의 임직원들은 「참고 기다리는데 익숙한 사람들」이다. 한번 실패해도 훌훌 털어버리고 다음 기회를 기약하는 것이 동부의 독특한 기업문화다. 그들은 지나간 일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는다. 어지간한 실수에는 책임을 묻지도 않는다. 지난 92년 이동통신사업자 선정 때도, 94년 한국비료 입찰에서도 고배를 마셨지만 문책성 인사가 있었다는 얘기는 없다. 위기에도 강하다. 국회 노동위 돈봉투 사건이나 전직 대통령 비자금사건에서 동부는 어느 기업에서 찾을 수 없는 뚝심과 배짱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독특한 동부의 기업문화는 김준기 회장과 동부그룹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동부그룹의 임원들 사이에선 『회장과 대화를 잘 풀어 나가려면 「사우디 이야기」를 꺼내라』는 말이 있다. 금회장이 70년대 중반 자신이 건설팀을 이끌고 중동에서 공사를 따며 고생했던 창업초기 이야기만 나오면 대뜸 얼굴이 밝아지기 때문이다. 중동에서 외화를 벌어 재계 14위(95년 매출액 기준)인 오늘의 동부를 일군데 대해 각별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금회장은 3공시절 공화당 거물로 국회부의장까지 지낸 부친 금진만씨의 후광 덕분에 사업을 키운게 아니냐는 세간의 이야기를 매우 거북해 한다. 그가 항상 주장하는 모토가 『나는 창업 1세』다. 실제로 김회장은 대학(고려대 경제과) 재학중이던 24세(69년)때 동부의 모체인 미륭건설(동부건설 전신)을 설립하고 줄곧 자신이 기업을 키워온 창업자란 인식을 갖고 있다. 동부는 허세를 싫어하는 금회장의 기업관 때문인지 겉으로 드러나길 피한다. 그래서 홍보, 광고 등에서 매우 소극적이다. 금회장을 비롯한 동부인들은 결정전에는 이모저모 많이 따지지만 일단 정하면 힘차게 밀어붙이고 진행과정도 비교적 꼼꼼히 챙긴다는 것이 이 회사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건설에서 시작한 그룹답게 소박하면서도 불도저같은 추진력이 있다는게 재계의 평가다. 김회장은 지난 85년 중동 철수때까지 10년간 40건 20억달러 규모의 공사로 돈을 벌어 그룹의 밑천을 삼았는데, 당시 금회장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함께 뛴 「미륭맨」들이 현재까지 주력기업 사장을 맡는 등 그룹 핵심위치에 포진해 있다. 대표적인 미륭맨이 손건래 동부화학 사장과 홍관의 동부건설 사장, 한신혁 동부산업 사장, 윤대근동부제강 사장 등이다. 이들 4명의 미륭출신 사장들은 김회장과 사우디 근무동지면서 대학동문(서울대 상대)이란 특별한 끈으로 연결, 결집력에 관한한 어느 그룹경영자들 보다 강하다. 동부그룹의 주요멤버들이 미륭맨이긴 하지만 동부는 「다국적군의 문화」를 내세운다. 중간에 인수한 회사가 많기 때문이다. 이들은 흡수된 회사를 따라 동부로 이적하면서 미륭을 모체로 형성된 「불도저식 건설문화」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금융과 무역, 유통, 정보통신 등 동부가 새로운 색깔을 만드는데 재료가 됐다는 것. 동부 관계자는 『공채기수가 이제 겨우 이사급이어서 상층 임원급 대부분이 초기영입 또는 인수회사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고 말했다. 이러다보니 동부에는 별도의 경영협의체가 없다. 다른 그룹의 기조실격인 경영조정본부도 각사 공통업무를 지원하는 지원부문 성격이 짙다. 조직을 통해 일을 하지 특정한 몇몇 사람들이 일을 하도록 하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이런 모습은 건설을 모기업으로 성장한 그룹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내용이다. 동부는 구성원들의 공동체 의식과 철학을 한 방향으로 묶기 위해 「동부인 육성과정」이란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 지난 93년부터 실시하고 있다. 『흡수 합병한 기업출신 사람들과 신입사원들에게 동부를 이해시키고 이들과 대화를 통해 새로운 동부그룹 문화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라는게 그룹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는 김회장이 『교육은 투자다』며 강력하게 추진을 지시하면서 도입됐다. 동부에는 김회장의 친인척들이 다수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금회장의 외삼촌인 김형배 회장은 사장단과는 별도로 경영의 전체방향과 산업정책 등 큰 흐름을 오너 회장에게 조언한다. 김택기 화재사장과 김무기 증권부사장은 친동생이며, 윤대근 제강사장(동서)·임주웅 생명보험 사장(매부) 등도 각자의 자리에서 경영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동부는 지난해 비자금 사건으로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사세도 넓혔다. 매출규모 3천억원의 화학업체 (주)한농을 인수했고 10여년간 적자에 시달리던 동부화재를 1천여억원의 흑자(당기순익)기업으로 변모시켰다. 13개 계열사를 거느린 동부는 지난해 매출액 6조원대에 재계순위 23위(95년 자산기준)에 올라 있다. 금회장은 최근 사장단회의에서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지만 이젠 그룹의 체질과 모습을 바꿔보자』며 미래경영에 대한 준비를 당부했다. 기존의 건설·제강·화학·무역·금융·유통업 외에 정보통신·유전공학·엔지니어링등 미래산업에도 눈을 돌리자는 의도다. 동부는 지난해 제 2창업을 선언, 2001년까지의 중기경영계획을 실천하고 있다. 최근에는 동부건설과 산업을, 화학과 한농을 합병키로 하는 등 대대적인 계열사 구조조정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동부가 변화무쌍한 21세기를 맞아 「실상경영」이란 다소 보수적인듯한 기업관에 어떤 문화를 접목시켜 발전을 꾀할 지 주목된다.<한상복> ◎김준기 회장 경영론/“경륜이 우선” 「50대 주체론」 주창/실적주의 배격 철저한 실리 추구/“공부만이 살길” 자기계발 강조 「실상추구 허상배격.」 김준기 회장이 주창하는 경영론의 요체다. 번지르한 겉모양이나 과시보다 내실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동부그룹의 발전은 이같은 독특한 경영철학에서 비롯됐다고 동부인들은 믿고 있다. 실상만을 추구하겠다는 김회장의 경영론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건설현장에서 다른 기업들이 실적위주의 수주전략을 구사할 때 수익중심 전략으로 맞서 튼실한 사업기반을 잡은 것과 한국자동차보험(현 동부화재)과 영남화학 등 부실기업을 인수해 정상화시키는 과정에서 김회장의 첫번째 경영지론으로 굳어졌다는게 측근들의 말이다. 동부가 보수적 기업으로 비춰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회장은 30대 임원이 나오고 발탁인사가 성행하는 요즘에도 『50대 임직원이 경영의 주체다』고 주장한다. 그는 주요그룹들의 「인사파괴」가 유행처럼 번지던 지난 3월 임원 세미나에서 「50대 경영주체론」을 주장, 눈길을 끌었다. 세태와는 약간 다른 논리를 편 것이다. 김회장은 『기업은 재능만 갖고는 안된다. 경륜이 바탕이 돼야 한다』며 『성공하는 사람을 볼 때 50대가 돼야 노하우가 쌓이며 60세 전후에 결실을 맺는다』고 말했다. 김회장은 그룹의 제 2창업을 선언한 지난해 실제로 50대 경영인을 대거 톱경영인으로 선임했다. 그는 틈만나면 직원들에게 『공부하라』고 강조한다. 지난달부터 시작한 「사업본부장회의」에서 그는 80여명의 본부장들에게 『자신이 사장이라고 생각하고 사업에 임하라』고 주문하고는 『사장이 공부를 안하면 사업이 망한다』며 자기계발에 힘쓸 것을 당부하고 있다. 김회장은 앞으로 매달 둘째주 수요일에는 사업본부장회의를 열고 본부장들을 챙긴다. 각 사업본부의 실패·성공사례를 발표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등 「만남의 장」의 성격으로 진행되는 이 회의에서 김회장은 약관의 나이에 시작해 오늘날의 동부를 일궈온 경영비화를 다수 공개할 것으로 예상돼 관심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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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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